초국적 투기자본과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해 뒷받침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시장이라는 종교를 세계 곳곳에 심고 있다. 환란을 겪은 대한민국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는 ‘시장숭배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시장공화국 또는 자본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지 않고 시장에 있다. 군사독재는 끝났으나 시장독재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군사독재시대에 힘이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있었다면 시장독재시대의 힘은 돈에 있다. 투자하기 좋은 곳,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국가정책은 물론이고 ‘재테크’ ‘부자되기’를 통해 생존경쟁을 부추기는 모든 것들 속에 시장독재가 스며들어 있다. 군사독재가 민중의 저항을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공포로 제압하였다면 시장독재는 ‘고용불안’으로 협박하고 ‘돈의 유혹’으로 저항을 누른다. 

시장독재시대, 그 품에 안기는 노조(?)

기나긴 독재시대에 국가통치를 위한 기구로서 어용노총과 노무관리 부서로서 어용노조가 있었을 뿐 민주노조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싹을 잘라 버렸다. 시장독재시대에는 큰 노조들을 돈으로 유혹하여 이권을 주고받는 노조들을 키우고 연대에 적극적인 노조는 싹을 잘라버리고 있다. 그리하여 민주노조는 점차 시장원리의 품안에 안기고 있다. 민주노총 내부에선 투쟁이냐 협상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문제처럼 떠올라 대의원대회의 폭력사건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정작 치명적 결정타는 이어진 ‘비리사건’이었다. 군사독재와 폭력탄압에 맞섰던 민주노조는 시장독재시대에 더 이상 민주노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21세기에 필요한 민주노조는 과거의 군사독재와 폭력탄압에 맞서던 ‘민주노조’가 아닌 ‘시장독재에 맞서는 새로운 노조’가 요구되고 있다.

‘이권노조냐 연대노조냐’는 이 시대가 노조에 요구하는 핵심적 질문이다. 시장경쟁원리는 상위 10분위의 월 가계소득이 776만원인데 최하위 10분위 가계소득은 42만원 수준으로 18배의 격차를 벌여 놓고 있다. 양극화 시대에 배타적 차별에 동의함으로서 자신의 이권을 옹호하는 데로 갈 것인지 차별에 저항하는 연대의 길로 갈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의 중심에선 상당수의 대공장들이 이권에 가까운 길을 가고 있다는 비판들이 확산되고 있다. 2005년 불법파견 비정규직문제를 둘러싼 투쟁과정에서도 이러한 우려는 강화되어 왔다. 문제는 ‘왜 이런가? 어떻게 우리는 이런 경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에 있다.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대항의 딜레마

97년 정리해고에 맞선 총파업 이래로 우리는 늘 기업 외부적인 요소들의 공격에 시달려 왔다. 정리해고와 파견제를 도입하는 개악, 주5일제를 둘러싼 근기법 개악, 지금 진행되는 비정규직법안 개악, 내년 2월로 예상되는 노사관계선진화 로드맵 등 기업 외적 공격에 대한 대응이 늘 핵심적인 쟁점으로 자리 잡아 온 것이다. 때문에 어느 한 해도 예외 없이 이에 맞서는 총력투쟁이니 총파업이니 하는 문제가 민주노총의 핵심 사안이 되어 왔다. 매번 이 사안을 둘러싸고 협상을 중심에 둘 것이냐 투쟁을 중심에 둘 것이냐 하는 종류의 논쟁이 반복되어 왔다.

정작 현장의 상황을 보면 과거에 비하여 투쟁에 대한 참여나 열기는 상당한 정도로 약화되어 있다. 반복적인 법 개정을 둘러싼 투쟁 속에서 조직력은 더욱 약화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당장의 총파업을 위한 현장순회를 하다 보니 다수는 아예 질문도 없이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또’라는 관성적 반복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차피 총파업은 안 되고 할 만큼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난 다음에 최선을 다 했다고 평가할 것 아니냐’는 냉소를 보이기도 한다. 법이 개악되면 우리는 심각해 질 것이라며 ‘상층의 위기의식 주입 → 대중동원’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노골적인 표현이 극소수에 발언에 그치고 있지만 ‘현장의 분노 → 대중투쟁전선’이라는 흐름과는 사뭇 다름을 부정할 순 없다.

“법개정→ 총파업 대응” 이라는 반복적 패턴으로 나가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성공적인 대응의 길인가를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시점은 아닐까? 

선택의 기로, 그리고 빈 구멍

총파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물론 법과 제도를 개악하는 현실을 눈감고 지나칠 순 없는 노릇이다. 최선의 노력을 통해 대응해야 한다는데 이견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밑바닥으로 향하는 경향을 막을 수 없다.

초기업적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초기업적 산별노조로 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더 확장해 본다면 기업은 기업 내부적 요소들에 의하여 경영과 고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투자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금융자본에 의해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한다. 이미 하나의 국민경제는 자율적 운영능력을 상실하고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업내부의 활동이 아닌 기업을 넘어선 산업적 수준은 물론이고 초국가적 수준에서 대응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의 다수의 경향은 초기업적 활동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비어 있는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게 된다. “상층에서는 전국 전선의 시급함과 연대의 당위가 매우 높지만 현장에서는 자기 문제에 대한 집착과 개인적 실리경향이 큰 상황”이라는 엇갈리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현장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에 맞서는 직접적 행동주의나 한 국가내부에서 계급타협을 고려하는 합의주의, 초기업적 대응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산별운동 등은 자칫하면 선언에 그칠 수 있다. 그렇다고 낡은 현장 정치 속에서 정작 현장은 빠진 현장주의를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민주노조운동 총체적 재구성을 위해

그러나 총파업을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라인의 정규직노동자들이 손에 ‘주식투자 무조건 따라하기’나 혹은 ‘부동산 투자법’에 관계된 책을 들고 재테크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 또한 쉽게 넘길 수 없는 현실이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시장독재’의 시대에 시장의 원리, 개별생존의 원리는 사회공동체를 해체하고 양극화로 밀어 붙이고 있듯이 노조활동의 기본단위인 현장 또한 ‘이권중심의 행동원리’에 의해 해체되어 있다.

이런 현실을 주목함으로서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어느 때 보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면 총파업보다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수없이 이어지는 법 개악에 맞서는 것 때문에 무너지는 우리 자신의 기초를 세우려는 노력이 침해받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기회비용을 고려하여 지금 이 문제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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