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는 드라마틱한(?) 동네였다. 민선 자치단체장 출범 후, 1·2대(연임) 공주시장은 임기 중 뇌물죄로 시장직이 박탈되었고, 바통을 이어받은 3대 공주시장 당선자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금품 살포한 게 걸려 4개월 만에 직무정지 돼 사퇴했다. 헌데, 금품 살포로 걸린 그 사람은 재빠르게 자신의 부인을 재보궐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시켜 당선시키는 드라마를 보여줬다. 더욱이 공주가 안방인 김종필(JP는 공주고 출신)이 지지하는 자민련 후보를 따돌린 충남 최초의 여성 자치단체장이라는 타이틀까지.

▲ 손은숙(29) 민주노동당 부산 해운대구위원회 조직부장은 4·15 총선 이후인 2004년 8월부터 민주노동당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직장인이며, 열혈당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지역 상근자를 시작하기까지 과정, 지역상근자로 활동을 시작한 후 겪는 일상사업의 난맥과 보람들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을 것이다.
2003년 봄…. 공주 곳곳은 “기호ㅇ번, 아무개,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을 하는 아줌마 선거운동원들로 시끌벅적했다. 하나같이 다들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시선은 땅을 향해 있는 아줌마 선거운동원들. 지난 대선 때 후진 유세차랑 ‘꾸진’ 앰프를 가지고 다녔을지언정 당당하게 얼굴 들이밀던 우리와는 달랐다. 일당 선거운동원의 대부분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 그것도 아줌마들인 이유가 이 사회의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의미한다는 지적을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곱게 봐줄 맘이 아니었다.

공주시장 후보로 다섯명이나 나왔음에도 다 ‘그분이 그분’, 민주노동당이 후보가 없었다. ‘♪ 찍을 사람 없다고 한숨쉬는 그대여~ 고개 들어 여기를 봐요~ ♬~ ’라고 맘껏 외치고 싶었지만, 돈도 사람도 내용(정책공약)도 없었기에 낸다는 꿈도 한번 못 꿨다. 후보를 내지 않는 선거 시기에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뭘 해야 하나? 당원인 우리들의 유일한 행동은 투표를 않거나, 기표지에 ‘민주노동당’을 쓰고 나오는거였다.

삶의 일상을 파고드는 부정부패

재보선 기간 중, 회사 회장님이 저녁을 쏘겠다며 직원 열댓명을 중국집으로 끌고 갔다. 그런데, 그 가게 바로 옆 공터에선 모 정당 공주시장 후보 유세가 준비 중인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그 후보는 자장면을 막 먹으려는 우리에게로 와 회장님과 친한 척 하며 우리들에게 한표를 부탁했다. 젓가락을 들고 ‘이것을 비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 그러나 아무말 없이 그냥 비벼 먹었던 민주노동당 당원이자 ‘깨끗한손’ 멤버였던 나. 부끄럽지만, 내 밥줄을 걸고 “이거 불법선거운동 아니에요?”라고 한마디 말할 용기가 그때는 없었다. 아깝다. 그때 지금처럼 50배 부과하는 선거법이었으면 몰래 신고해 15만원 버는 거였는데.

시민과 대화하기엔 여전히 서툰 운동권의 재발견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공주에도 개혁적·민주적 흐름을 만들고자 하는 공주시민단체협의회(공단협)라는 게 있었다. 그 단체를 움직이는 주요 구성원들이 2002년 대선 땐 노무현을 지지했으나, ‘이라크 파병 문제’와 ‘미선이 효순이 사건’을 대하는 노무현 정부에 실망해 민주노동당에 관심을 보이며 공주에서 ‘젊은피’였던 민주노동당 당원들을 찾기 시작했다. 공단협 집행위 회의가 다시 가동되고 보니, 각 조직을 대표해 온 사람들이 다수 민주노동당 당원들이었다.

6·13 미선이 효순이 1주기를 맞아 공단협으로 중심으로 촛불 추모제가 준비됐다. 기획에서 실무 준비까지 주축은 젊은 민주노동당 당원들이었다. 농민회나 학생조직을 대표해 사람들이 다 민주노동당 열성당원들로 구성됐다. 우리는 젊은 패기로, 매번 하던 인적 뜸한 공주산성 연문광장을 벗어나 교통장애를 좀 주더라도 시내 사거리의 집회를 준비했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판’을 만들자는 의지로.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추모제에 그럭저럭 사람들이 모였고, 위치가 좋아 하교길에 중고등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손쉽게 참여할 수 있게 ‘미선이 효순이에게 편지쓰기’ 코너도 마련하고 대나무와 종이컵, 피티병을 이용해 ‘희망새 촛대’를 준비해 꼬마아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런데, 추모제 판이 진행되면서 나는 4~5년 전 대학교 집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문화와 언어들. 주변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확확 줄었고, 시민들과의 대화가 아닌 조직된 우리들만의 결의의 장으로 집회는 마무리되었다.'시민들과 함께' 소통하는 자리가 아닌 조직화된 우리만의 자리에 머물렀다. 지금도 민주노동당에게 어려운 숙제인지 모른다. 그 숙제를 풀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소수이지 않을까?


이래저래 접촉면 넓히기

2002년 대선 후, 민주노동당은 당원의 확대와 인지도 상승 등 도약을 했지만, 사실 공주 지역의 당원들은 여전히 막막함 속을 헤맸다. 우리 모두는 ‘정당운동’의 초짜였다. ‘유인물이라도 돌려야겠다’ 생각했던 나도, 조직적 결의에 의해 입당한 사람들도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고민과 토론이 없었는지 모른다.

한달에 한번 당원모임에 10명 이상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뭐든 하기로 했다. 처음에 제안되었던 것은 정기적인 ‘당원 일일농활’이었다. 공주가 시골도시니 농민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다 보면 뭐든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잘 되면 당원뿐 아니라 시민들로 확대할 수 있다는 설렘을 품고 시작했다.

그러나, 3~4번 진행된 농활은 당원들끼리 가기에도 버거웠다. 농활에 참여하는 당원(5~6명)들이 대부분 미래의 어느 시점엔 농부가 되고 싶다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즐겁게 수행했지만 그거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 쪽수가 안 되니 당원 집 일만 하게 되었고, 그 동네 주민들은 잠시 스쳐 인사할 뿐이었다. 우리 농민당원들은 “오늘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와서 일 도와줘요” 하는 자랑과 함께.

다음으론 공주 정치판에 개입하기 위해선 지역에 대한 공부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정책 생산이 필요하니 공단협 틀 속에서 강연회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공주의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교수, 전문가들을 만나 제안 배경을 설명하니 다들 흔쾌히 함께 하자 하셨다. 헌데, 딱 두 번 진행되고 더이상 추진 못했다. 2002년 ‘홍세화 선생 강연회’의 흥행성공 때문에 기대가 켰을까? 10명도 안 되는 참석자로 인해 강연을 준비해주신 분께 너무 미안해 에너지를 잃어버렸다. 당에도 공단협에도 상근활동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자위하지만, 돌이켜 보면 소수라도 그 속에서 공부하고 공주지역 정책대안을 고민하는 네트워크가 지속되었다면 민주노동당 지방자치에 기반이었을 텐데 아쉽다.

대부분이 그랬다. 뭐든 해보자 싶어 기획해 야심차게 추진했다가 흐지부지 끝나기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그땐 마냥 즐겁기만 했다. 당 활동은 일종의 놀이였다. 동학농민운동의 얼이 깃든 우금치 예술제를 준비하면서 민주노동당이 독창적으로 뭘 하자 싶어 ‘장승깎기’에 도전했다. 우리가 직접 깎은 장승들로 우금치 고개에 울타리를 세워 또 하나의 명물로 만들어보자는 야심찬 꿈. 비록 6명의 당원으로 한번 밖에 진행 못해 울타리 세울 만큼은 만들지 못했지만, 3개의 장승에 ‘민주, 평등, 해방 민주노동당’이라 써넣고 우금치 예술제 행사 때 입구에 ‘뽀대나게’ 심어 민주노동당의 흔적을 남겼다.


<편집자 주> 2002년 지방선거에서 2004년 총선까지는 민주노동당이 성공적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하던 시기였다. 반면 총선이후 불과 1년반만에 민주노동당은 ‘위기’를 말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뛰고 있는 일선활동가들은 ‘개척과 성공,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위기’까지 각각의 국면에서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왔을까? <매일노동뉴스>는 지역위원회와 시도당, 중앙당과 정책연구소에서 일하는 민주노동당 일선활동가들의 '눈물과 땀'을 각각 5회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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