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만 비정규직도 모자라 온 노동자를 비정규직의 수렁으로 몰아넣을 정부의 비정규보호(?)법을 몰아내고 권리보장입법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결의가 뜨겁다. ‘특수고용’ 비정규 문제 해결을 위한 여의도 국회 앞 천막농성장. 이곳을 지키는 붙박이는 단연 학습지노조다. 그 흔한 노조 전임조차 한명 없는 학습지노조지만 간부들은 수업이 없는 날이나 수업을 마치고, 저녁이면 1~2명씩 짝을 이뤄 천막농성장을 지킨다.

서산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서훈배(38)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위원장은 지난 10월말까지 보름여 단식농성을 지속했고, 그뒤에도 천막농성장을 사수하고 있다. “우리가 레미콘, 덤프, 화물처럼 대규모 조직 동원은 못해도 농성장을 사수하고, 연대집회에 참석하는 등의 일은 잘 합니다.” 저녁11시가 되어서야 노조 회의와 토론이 가능한 희한한 노조. 그래서 학습지노조는 ‘올빼미노조’, ‘야간노조’로 불리기도 한다. “87년 이전 헌신적인 선배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주변의 비정규 활동가들의 말이다.

까칠하고, 초췌한 안색에도 피곤함을 잊고 웃는 얼굴로 기자를 맞이하는 서 위원장.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서일까? 그 웃는 얼굴에는 아이들의 천진함이 배어 있다. 그는 위원장직을 수행하면서도 충남 서산에서 현직 학습지교사 일을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하루 한두 과목을 소화하고 1시간30여분 정도를 달려 서산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한다. 지난해 11월 학습지노조 위원장을 맡은 이래 벌써 1년째다.

물론 다른 학습지교사와 견줘 담당 과목과 수업시간은 턱없이 적다. 노조의 책임자란 이유로 수익감소를 감수하고 수업시간을 줄였기 때문이다. 40~50만원의 쥐꼬리 월급은 노조활동비로 나간다. 다른 활동 간부들도 정도의 차이뿐 사정은 비슷하다.

“IMF 이전에는 대전의 한 보험회사 법인영업팀에서 일했어요. 주로 학습지, 골프장 영업을 했는데, 그 인연으로 지금 학습지교사를 하고 있네요.” 당시 주 영업대상이 현재의 특수고용 사업장인걸 보면 ‘특수고용’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연봉 6천여만원을 받는 잘나가던 보험회사 관리팀장. 그러나 구조조정은 피해가지 못했다. 서 위원장은 98년 보험회사를 퇴사하고 1년여 다른 일을 했다. 그러던 2000년, 아내가 일하고 있는 대교 눈높이 교사로 들어갔다.

‘특수고용’ 뗄레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

95년경 아내에게 대교 학습지교사를 추천했던 서 위원장. 입장이 바뀌었다. “보험영업하면서 보니까 당시 학습지교사들 월급이 150~160만원 정도였어요. 4대보험, 퇴직금 없는 것 생각도 않고 아내에게 추천했던 거죠.” 아내와 함께 열심히 아이들 가르치며 돈벌 생각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그를 편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입사 3개월 무렵 대교에 다니는 대학 노래패 선배가 찾아왔다. “노조를 만들자.”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80년대 말 치열했던 학생운동의 세례(?)를 맛본 그였기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불과 두달만에 서산, 당진, 보령, 예산 등 충남지역 6개 지점 100여명의 교사가 모여 대교충청지부를 만들었다. 대교교사노조가 정식 창립총회를 갖기 전인 2000년 8월 중순이었다.

노조 결성에는 재능이 이미 99년 파업을 했던 것과 함께 ‘눈높이교사권리찾기모임’이 인터넷 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던 배경이 컸다. 그 과정에 아내는 큰 힘이 되었다. 이미 학습지교사 6년차로서 실적도 좋았고, 주변 교사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대전의 한 대학에서 만난 철학과 선후배 사이. 대학 4학년 때부터 시작된 동거는 그뒤 11년간이나 지속됐다. “굳이 결혼이란 제도의 틀에 갇혀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죠. 그런데 가족, 친척들의 성화에 못 이겨 2001년 정식 결혼식을 올렸어요.”

서 위원장은 2002년 지회장, 2003~2004년 대교지부장에 이어 2005년 학습지노조 위원장을 맡게 됐다. 아내는 그가 학습지노조 위원장에 당선되자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학습지를 그만두고 동네에 ‘공부방’을 만들었다. 힘들다는 내색도 않고, 생계걱정 하지 말라는 아내. 서 위원장은 미안할 뿐이다. 마음이 약해질 때도 아내는 자신을 다 잡아준다. “단식한다고 하니까 ‘하면 제대로 하고, 피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하더라구요.” 강단 있는 아내, 그는 민주노동당 서산태안지역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탄압은 일상적인 것, 투쟁으로 돌파

“5~6년 동안 조직을 유지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경이롭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간부들의 말처럼 학습지노조는 형태는 다른 ‘장기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셈이다. 전국의 학습지교사는 10만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 학습지노조의 조합원은 1천여명이 채 되지 않는다. 최소 10%인 1만여명은 조직해야 힘있는 노조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

2001년 학습지노조에 가입한 부산 한솔지부의 경우, 학습지노조가 산별기능을 제대로 못하면서 2003년 경 부산일반노조로 가입했다. 대구의 ‘장원한자’도 산별가입을 독려했으나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에 직접 가입했다. “외롭고 힘든 지역에서의 싸움에 지지와 지원을 다하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조직력의 복원과 확대강화를 꾀해야죠.”

그동안 단일노조로 존재했던 재능교육교사노조가 학습지노조와 통합을 준비중이다. 재능은 노조결성 뒤 회사측과 임단협을 체결해 노조사무실과 전임자도 확보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다. 다른 지부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하향평준화의 우려도 제기된다. “단협을 맺고 있지 못한 학습지노조들이 많기에 기존 재능에서 맺은 단협의 유지와 확대가 중요합니다. 어차피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3권 쟁취가 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탄압은 일상적인 것이고, 투쟁으로 돌파할 지점이라 봅니다.”

학습지노조는 2001년 이후 이렇다 할 큰 투쟁을 하지 못했다. 학습지교사의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3권 쟁취’라는 당면의 문제. 그러나 늘어나는 이직률, 떨어지는 조직률, 그 간격을 채우기 위해 서 위원장은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몬, 웅진, 프뢰벨, 대교 등 학습지노조 산하 지회의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는 선전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노조가 안 되는 100가지 이유, 학습지교사는 ‘사업자’라는 인식을 끊임없이 심어주고 있는 상황. 선전홍보물을 들고 가도 의도적으로 시비를 붙이고, 경찰을 부르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학습지교사의 ‘마음 속으로’

‘브나로드’ 운동처럼 철저히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위한 선전방식의 변화도 눈에 띤다. 투쟁조끼나 피켓팅 등 기존의 거부감을 줄 수 있는 것은 벗어버렸다. 수업복장(정장)으로 조용하고, 내실있게 조직사업을 펼치려는 것. “눈높이를 낮추고, 긴 호흡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특수고용’은 대장정에서 배워야 합니다.”

서 위원장은 자나깨나, 어떤 책을 읽어도 학습지 노동자의 단결과 조직화 방식을 고민한다. <삼국지>와 <세계를 뒤흔든 열흘> 등 단식 가운데 책을 읽으면서도. 광복6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된 대장정과 조선의용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보면서도. 온 신경은 그리로 가 있다. “사실 모택동의 대장정은 열세인 상황에서 정규군인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피해 1년 내내 도망다닌 것이잖아요. 그런데 ‘유격전’, ‘철의 규율’, ‘민중의 마음속으로’ 등을 통해 승리했어요. 시사점이 많아요.”

교사들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다잡고, 개량적 ‘유사2권’에 맞서 당당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외치고 싶은 마음. “땅 차지하는 것보다 인민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학습지교사의 마음 밭을 점령하자.” 서훈배 위원장이 가슴 속 깊이 담아두고 있는 말들이다.

“‘시장의 위기’는 구조조정을 낳고 구조조정의 음산한 분위기는 부정업무를 낳고 참을 수 없는 부정업무 강요는 떠나는 무수한 발걸음을 낳고 그 빈자리는 또 다른 신입교사를 낳고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교사는 또다른 부정업무를 낳고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고….” 서 위원장이 쓴 <학습지교사 이야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학습지 재벌에 맞서 ‘당당하게 가르치고 싶은’ 교사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서 위원장. “학습지노조는 돈독 오른 회사의 사교육 확대 조장을 막고, 사교육의 병폐를 막을 균형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부당영업을 강요하는 학습지 업계의 현실, 교사들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지 오래이며 생존의 위기에서 허덕일 때 학습지 재벌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학습지회사는 ‘영업은 인격’이라며 교육자에게 끊임없이 영업마인드를 강요하고, 이윤추구에 눈이 멀어 교사를 부당영업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더 큰 각성을 하고 있다는 서 위원장.

개별현장을 넘어 전국전선을 향해

그는 당장은 힘들고 고단할 지라도 결국, 힘을 길러 한판 투쟁을 승리로 이끌 생각에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그의 현재 비정규운동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들어보자. “하이텍알씨디, 하이스코, 하이닉스, 산업인력공단비정규노조 등 개별현장에서의 전투는 치열했지만, 전국적인 전선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장을 사수하고 노조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성 쟁취’와 ‘노동3권 확보’를 위한 공동노력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10월부터 국회 앞 천막농성장을 붙박이처럼 사수하며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고, 투쟁하는 노동자. 서훈배 위원장과 학습지 노동자들은 12월 1일, 위력적인 총파업 투쟁의 ‘도화선’ 역할을 하고 있다.

특수고용노동자의 권리보장입법과 학습지노동자
학습지 등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은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에서 개념의 차이가 있다. 근로기준법은 개별적 규제의 영역으로 노동자를 개별 보호하는 4대보험이나 퇴직금, 부당해고의 문제 등이 다뤄진다. 노조법은 집단적 노사관계의 유지문제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노동3권이나 부당노동행위를 다룬다.


현재 특수고용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동부, 노동위원회, 법원별로 입장이 제각각이다. 학습지교사의 경우, 현재 노동부나 노동위원회는 노조법상 노동자로서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재능교육교사노조를 시작으로 학습지노조 산하 지부활동에서 보듯 노동부는 노조 설립신고를 수리하고 있다. 재능노조가 신청한 조정에서 중앙노동위원회는 노조법상 근로자임을 전제로 조정안을 제시하지 않고 조정중지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법원은 학습지교사의 노동자성에 관해 명시적인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한편, 근기법상으로는 세 기관 모두 노동자성을 부정하고 있다.


학습지노조는 노조법과 근기법상의 노동자성을 부정당하면서 부정업무 강요와 산재 불인정, 해고, 손배가압류, 인신공격, 교실미배치, 음해, 따돌림 등 각종 부당노동행위에 노출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학습지노조는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3권 쟁취’는 양보할 수 없는 목표라며 투쟁하고 있다.


최근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특수고용’ 노동자 문제를 풀 법안을 내년에 입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내용은 경기보조원 등 특수고용 가운데 일부만 근로자와 노조 허용, 모두 근로자도 아니고 노조도 불허, 노조는 허용하되 근로자는 불허 등이다. 기존 수명이 다한 ‘노사정위 특고특위’에서 논의된 수준 이상이 없는 것이다.


전비연 등 비정규노동 단체들은 “노사정위 특수고용특위가 지난 9월3일로 수명이 다했는데도 여전히 정부입장이 ‘노사정위 논의’로 되어 있는 것을 용인하는 교섭결과는 있을 수 없다”며 노동계의 공세적인 권리보장입법 요구를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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