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연구소. 그렇게 ‘섹시’하지는 않은 이름의 이 연구소는 민주노동당 부설 정책연구소이다. 진보정치연구소는 당의 부설 연구소이긴 하지만 당으로부터 ‘독립적인’ 그리고 ‘독자적인’ 비영리 재단법인이라는 법적 지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정치연구소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모든 것을 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속시키길 좋아하는, 또 그렇게 하는데 익숙한 민주노동당이 그 자체로 독립적이며 독자적이며 완결적인 사업구조를 갖는 진보정치연구소를 만들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혹자는 ‘정책정당화’라는 시대적 명분에 따라 개정된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상의 규정을 들이댈는지 모르겠다. 즉 현행 정당법과 정치자금법은 각 정당에게 중앙당에 별도의 법인으로 정책연구소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으며, 각 정당에게 지급되는 국고보조금 중 30%이상의 금액을 연구소의 운영에 쓰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법적 강제에 굴하여 진보정치연구소를 만들었다고 답해버리는 마는 것은 진보정당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답게 정당법과 정치자금법의 개정 이전에 이미 정책연구소를 설립하겠다고 결정한 바 있다. 그것도 다름아닌 (2003년도) 정기당대회 자리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니까 민주노동당은 “정책정당, 대중정당의 면모를 확립”하고, 이를 위해 “당내외 정책역량을 결집”시키며, 이를 통해 “정책연구역량을 강화하고, 당 정책연구소 건설을 준비한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필자가 2002년부터 당의 정책위원회에 상임정책위원으로 결합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연구소 추진위원을 거쳐 현재 연구기획실장으로 연구소 사업의 총괄 책임을 맡게 된 것 모두 2003년 정기당대회의 결정과 무관하지 않다 할 것이다. 어렵고도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어코 해버리고 만 것이다. 드물게나마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서의 불굴의 실천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면 다소 과장된 것일까?

10석 확보와 함께 추진단 결성

2004년 4.15 총선을 통해 10석을 확보하면서 원내 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소의 설립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어진 혹은 미룰 수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총선 직후부터 5, 6월 초동모임을 거쳐 그간 강령제정 등 당 건설 과정과 정책위 활동을 통해 결합되었던 교수 및 연구 역량을 중심으로 추진단을 구성, 7월에 들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추진단에는 단장으로 조돈문 교수(카톨릭대 사회학)와 오랫동안 정책위 부위원장 역할을 맡아 활동해왔던 조현연 교수를 필두로 노중기(한신대 사회학), 송주명(한신대 정치학), 신정완(성공회대 경제학) 교수, 당 인권위원이었던 박갑주 변호사 등이 중심이 되었다. 진보소장학자들이 주축을 이룬 것이다. 이들은 후일 연구소의 부소장과 연구기획단장 그리고 연구기획위원과 비상임연구위원 등으로 활동하게 된다.

추진단은 이사진 구성을 비롯한 인적 배치와 활동 목표 및 방향 설정을 위한 작업을 전개한다. 우선 이사진 구성에 있어서는 당의 전 대표였던 권영길 의원이 이사장을 맡게 되었고, 당의 전 부대표였던 최순영 의원, 주대환 신임 정책위 의장, 인권위원장을 역힘했던 이덕우 변호사 등이 이사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활동목표를 구비하기 위하여 중장기적 국가전략 구상과 국정 현안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정책개입표 및 방향으로는 다음과 같은 과제들이 도출되었다. 첫째, 진보적 대안정당으로서의 면모을 수행한다. 둘째, 각종 지배이데올로기 및 담론 등에 대한 대항담론을 구성하고, 당의 집권전략의 수립과 함께 진보이념의 구성과 개발에 주력한다. 셋째, 현안대처를 넘어 상실과 소외 영역을 중심으로 한 ‘이슈의 발굴 선점’에 주력한다. 넷째, 단순히 학술 연구자 및 전문가에 그치지 않는 현장성을 담지한 정책운동가를 육성한다.


‘진보판 헤리티지’ 꿈꾸기

한편 필자는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들의 활동 사례와 성패요인에 대한 검토를 거쳐, ‘진보판 헤리티지’가 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많고 많은 싱크탱크 중 왜 하필 보수적 성격, 특히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해야 한다고 했던 헤리티지를 모델로 삼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때로 ‘진보는 보수에게도 배워야 하는 법’이고, 때때로 ‘보수는 진보보다 더 진보적인 법’이다. 특히 싱크탱크 운영의 노하우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러했다.

헤리티지는 AEI(Ameriacan Enterprise Institute) 등의 다른 유명 싱크탱크들에 비교할 때, 활동의 이념적 목표는 물론 지식동원망 및 지지기반의 분명한 설정과 정부와의 관계 등에 있어서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헤리티지의 성공에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헤리티지는 ‘포괄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유론자들의 반감을 피하고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저명한 신보수주의자들을 유인하였다. 또한 헤리티지는 행정부 내의 ‘진짜’ 보수주의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정부를 변호하고, 정부가 자유주의자나 온건파들과 타협하려 할 때마다 정부 정책에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헤리티지 소속 연구자들은 ‘유기적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헤리티지 소속 연구자들은 대학원생 정도의 젊은 정책운동가로서 학위 소지 여부를 떠나 헤리티지의 정치적 목적(보수주의 두뇌집단형성)에 동의하는 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은 고고한 척 폼 잡으며 어려운 이론서를 읽으며 전문지식을 쌓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국회 사무실이나 마감에 분주한 언론사와 같은 역동적인 정치활동가들 혹은 저널리스트들의 공간같았다고 했다.

이들은 보수주의 운동에 필요한 자료와 아이디어들을 정비하는 작업을 주로 하면서 정부업무나 능률 개선이 아니라 특정의 아이디어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이들은 자기분야에 관한 학술서적을 알고 정책논의의 주요 쟁점들도 파악하고 있지만, 그런 지식을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했다. 헤리티지는 연구역량을 뽑을 때, 여기는 연구소가 아니라 정치가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쓸 글이 학자들이 아니라 정치가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고 했다. 그러니까 헤리티지 소속의 연구자들은 뚜렷한 목적 없이 단지 이론적 문제를 탐구하는게 아니라, 특정의 이념이나 원칙에 맞게 정책논의의 방향을 정하고 이를 관철하려는 분명한 의도 하에 연구에 임했던것이다. 이 때문에 헤리티지 소속 연구자들은 보수정책을 위해 싸우는 특공대나 해군상륙부대라고 비유된다고 했다. 어찌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름 짓기

후일 이사회가 구성되면 정식으로 결정할 것이지만 추진단의 활동 과정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연구소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게 이름을 지어주듯이 말이다. 추진단은 당원들에게 이름 짓기 공모전을 실시했다. 진보정치연구소를 제외하고 이때 나온 이름들로 기억에 남는 것은 ‘진보전략연구소’, ‘새세상 연구소’, ‘평등사회연구소’, ‘대안사회연구소’, ‘사회정의연구소’, ‘사회혁신연구소’ 등이 있었다. 사실 추진단 논의 때 진보정치연구소는 그리 크게 호응을 얻은 이름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최고위 논의와 이사회 논의 등을 거치면서 막상 결정된 것은 진보정치연구소였다.

매력적인 다른 이름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무난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발기인 대회에서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이 3등이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1등이 되어 현재 당의 이름이 되어버린 사연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진보판 헤리티지를 꿈꾼다고 했는데, 미국 민주당 지도자협의회 산하의 씽크탱크인 진보정책연구소(Progressive Policy Institute)와 같은 영문 약자(PPI)를 쓰게된 것이다. 진보정치연구소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자는 공식명칭인 ‘새세상을 여는 진보정치연구소’에서 새세상을 강조, 약칭을 ‘새세상’ 연구소로 한다고 하면서 개명을 하고자 하는 ‘수작’을 장석준 추진단 동지와 함께 벌였으나 다 수포로 돌아갔으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야속하게도 진보정치연구소라는 명칭을 애용해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름에 불만있냐고 하면 자신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삼순이’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추진단은 이름짓기와 함께 연구과제 도출을 위한 조사작업도 전개하였는데, 대안외교노선, 복지혁명과 관료혁신모델, 지방경제권 형성방안, 중소기업육성방안 등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후일 이는 연구사업에 반영된다.

추진단의 활동은 크게 무리가 없는 듯 했다. 이제 이사회 구성도 했고, 이사회의 공식 논의를 통해 소장 인선 등의 과정을 거쳐 실제 연구소를 발족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난관 없는 일이란 없다. 추진단은 연구소의 정식 발족에 커다란 난관을 맞게 되니 소장 인선 파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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