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1일,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이끄는 연립 여당(자민+공명)은 개헌선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획득했다. 연립 여당이 전체 480석의 2/3를 넘는 326석을 거둬들인 것이다. 이중 자민당의 의석은 모두 296석이었는데 이는 총선 전보다 59석이나 늘어난 수치다.

총선의 중심 의제는 ‘우정국 민영화’였다. 우정국 시스템(저축, 보험, 지국, 우편배달)을 2007년까지 기능별로 분할해 민영화를 추진, 2017년까지 이를 완료한다는 것이다. 고이즈미는 우정국 민영화에 대한 찬반 입장을 각각 개혁/반개혁으로 획일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무기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개혁(?)에 ‘Yes’냐, ‘NO’냐

아직 국내 언론에서는 일본의 우정국 민영화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우정국 민영화는 단지 ‘우체국 기능이 사기업에 넘어가는 바람에 일본 산골의 주민들은 우편배달 등의 공적 서비스를 받지 못할 우려가 크다’는 정도로 평가할 사건이 아니다. 이는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과 한-미-일 및 동북아의 국제 관계에 조만간 밀어닥칠 거대한 변화의 신호탄이다.

우선 일본의 우정국은 한국의 우체국과 많이 다르다. 우정국은 일본 전국에 2만5천여 지국을 거느린 우편배달 시스템일 뿐 아니라 이 나라 최대의 저축, 보험 기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정국에 축적된 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저축 계좌에 2조 달러, 보험 계좌에 1조 달러 등 무려 3조3천억 달러에 달한다. 엔화로는 300조 엔, 원화로는 3천조 원 규모인 것이다(최근 한국의 1년 예산은 200조 원 안팎).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이 축적되어 있는 단위로는 일본 우정국이 유일하다.

우정국 민영화의 핵심은 지금까지 일본 국내에서 잠자고 있던 이 거대한 자금의 운용권이 일본 정부에서 세계 금융시장으로, 운용 범위도 일본 국내에서 세계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별칭 중 하나는 ‘건설 국가’(Construction State)였다. 고속도로, 공항, 다리, 댐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경제의 주요 원동력으로 삼는, 즉 ‘건설로 먹고 사는 국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일본 건설 국가’ 시스템의 중심에 우정국 기금이 있었다. 일본 민간 자금의 60%에 달한다는 우정국 기금이 정부 통제 하에 있었던 셈이다.

즉, 일본 시민들은 1% 이하의 초저금리인데도 원금보장의 국가 운영 시스템인 우정국에 막대한 자금을 갖다 안긴다. 우정국은 이 돈으로 일본의 국채를 구입한다. 이렇게 우정국에서 나온 돈으로 일본 정부는 사회간접자본을 과잉 건설, 일본 사회에 돈을 뿌려 경기를 부양한다. 일종의 일본판 케인스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정-관-경의 유착과 부정부패를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참고로 일본의 정치가-관료-건설업자 커넥션은 ‘건설 국가’의 ‘악의 축’으로 불리고 있다.

미국의 종속국으로 가는 길

물론 건설국가 시스템 혹은 일본식 케인스주의는 일본경제의 장점이라고 하는 종신고용, 복지시스템 등의 제도와 중소기업 등을 지탱하는 기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시스템은 경제성장률이 높을 때만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메커니즘이었고, 1990년대 초 거품붕괴 이후인 저성장 시대엔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자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건설국가는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이 되었다. 그리고 우정국 기금은 일본 정부가 국내 경기를 떠받치기 위해 ‘계획적’으로 배정하던 안정 자금에서 현란한 금융연금술에 바탕, 세계 금융시장에서 운용되는 투기성 자금으로 눈부시게 변신할 전망이다.

일본의 우정국이 민영화되기를 가장 갈망했던 것은 미국이다. 미국이 생산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는 국가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결과는 매년 수천억 달러씩 쌓이는 미국의 재정, 무역 적자이다. 그리고 이런 미국경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역량은 동아시아의 한-중-일, 특히 일본이다. 최근 수년 동안에도 일본 정부는 미국 재무부 채권을 구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천억 달러를 미국에 바쳤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 국내 자금 중 해외에서 운용할 수 있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재무부 채권을 구입하라고 ‘명령’해도 되고, 미국의 국책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산운용 회사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우정국을 민영화하라고 일본 정부를 압박해 왔다.

지난 2004년의 부시-고이즈미 정상회담에서도 부시가 가장 강조한 것은 우정국 민영화였다. 고이즈미는 ‘최선을 다 하겠다’고 대답했고 이는 미국의 의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일본의 국수주의 정치가인 가메이 시즈카는 지난 총선과 관련, “총선의 의제는 개혁(우정국 민영화)에 대한 ‘예스’냐 ‘노’냐 가 아니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종속에 ‘예스’할 것인가, ‘노’할 것인가의 문제다”라고 했는데 거짓말은 아니다.

일본의 금융대국으로의 꿈

그러나 일본으로서도 우정국을 민영화해야 하는 내적 동기가 있었다. 우선 평화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간절한 요구를 충족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극우파는 예전의 반미 입장을 최근 친미로 전환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의 개’라고 불리긴 하지만 이는 결코 고이즈미 본인이나 일본에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을 깔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제조업 대국’이지만 ‘금융 대국’은 아니다. 또한 그동안 경제성장의 결과로 국내엔 엄청난 자금이 쌓여 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이 금융자산들은 국내에서 초저금리로 경기를 받치는 데 사용될 뿐이었다. 더욱이 역시 최고 수준의 고령화(현재 1위는 한국)가 진행되고 있으며 제조업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이나 투자 대상은 점점 더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나름대로의 돌파구가 금융산업을 육성하고, 국내의 엄청난 금융자산을 세계 금융시장으로 내보내 ‘돈 놀이’(자산운용업)를 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지난 일본 총선과 관련, 최근 들어 세계적인 수수께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선거운동 과정에서 “‘우정국 민영화’가 일본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우정국 민영화=개혁’이라는 단순한 도식이 지배한 선거였다. ‘우정국 민영화’ 자체에 대한 일본 사회의 논의는 총선 사흘 뒤인 9월14일 <아사히 신문>이 칼럼을 통해 “(우정국 민영화는) 미국의 재정, 무역 적자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임시 방편”이라며 “이후 달러 가치가 추락하면 우정국 저축을 가지고 있는 일본 시민들이 생계 자금을 날릴 수 있다”고 비판한 것이 고작이라고 한다.

더욱이 이는 달러화 추락 등의 돌발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를 우려하는 것인데 설사 우정국 자금이 해외에서 성공적인 운용 성과를 거두고 일본이 아시아의 금융대국이 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만만치 않다. 이는 부정부패와 낭비, 정경유착을 초래하긴 했으되 우정국 자금은 국내용 자금으로 사용되어 불황에 시달리는 서민 경제를 지탱해왔기 때문이다. 우정국 민영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경우 실업난과 빈부격차가 더욱 격심해질 것이며 재정, 채권시장, 환율, 금리 등의 거시경제 변수들이 일대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러움'?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9월, 일본의 중의원 해산 및 총선과 관련, “자리를 걸고 승부하는 고이즈미 총리가 부럽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정국 민영화에서 본 것이 고작 고이즈미의 정치적 ‘승부수’라는 것은 실망스런 이야기다. 금융허브를 국정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은 고이즈미의 정치적 술수 보다 인근 강대국인 일본이 미국과 긴밀히 유착, 금융대국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을 먼저 보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자고 국민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일본의 금융대국화는 극우 드라이브와 함께 21세기 초반의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Koizumi's Coup」(Gavan McCormack), 「글로벌 금융자본주의 체제 하의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이찬근), 「Korea, Japan, the Global Dollar Crisis, and the Six Power Statement」(Kathy Wolfe) 등을 참조해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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