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총선부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등 보수양당이 한 목소리로 낸 주제는 민생이요, 경제살리기였다. 민주노동당도 주요 핵심과제로 민생사업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서민의 실생활의 개선은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다.

보수양당은 서민경제 살리기와 무관한 ‘민생’ 정책을 제시했고, 때문에 서민 속에 뿌리박는 사업을 전개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지난 대선, 지방선거, 총선을 거치면서 선거평가를 통해 일상적 지역 활동을 통한 민생활동 안착화를 외쳐 왔으나 실질적인 침투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믿을 만한가?

어떻게 민생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사실 민주노동당은 많은 사업에서 민생이란 이름을 내세웠지만, 실상 민생과 관련 없는 사업을 전개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모든 사업에 민생이란 이름을 붙이거나 상담활동을 민생활동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오류는 구체성이 결여된 시혜성 정책의 남발, 캠페인 기획행사 남발, 이벤트성 사업의 남발, 당의 '심부름센터화'로 이어졌고, 서민들의 당에 대산 불신감을 증폭시켜 이른바 ‘양치기 소년’ 효과를 양산하거나 일만 많은 내실없는 소모성 사업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맹목적인 수만명 서명, 수천명 가두선전전, 어디어디 방문 등은 서민경제 문제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이룰 수 없고, 사실상 우리만의 참여와 잔치로 끝나기 십상이다. 사업 관련 서명용지는 있으되, 서민들에게 일상적인 참여를 촉진하고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다가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소모적 사업, 내실없는 잔치

민생문제의 핵심은 정책과 실현 과정이 서민대중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지 여부다. 민생정책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의 권리와 이익을 삶의 현장 속에서 대변하기 위해 피해 구조활동과 제도개선을 도모하는 것이다.

서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고통은 잘못된 경제 질서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조직하는 게 바로 민생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비민주적인 경제적 관계로 파생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부동산 임대차 문제, 채권·채무 문제가 삶의 현장에서 일으키는 다양한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이 민생정책이다.

이런 측면에서 서민경제 살리기와 직결된 민생사업은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보수정당의 홍보, 이벤트용 민생사업과 구분된다. 민생의제를 실현하는 과정은 시혜자와 수혜자의 관계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쌍방향적 의사소통과정(이해당사자 : 문제제기, 당 : 분석 및 대안 제시)을 통해 정책대안 마련 및 문제해결과정을 당이 이해당사자와 함께 일체화 하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무기부터 만들어라

당의 주요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은 일방적인 선언 내지 공포로 되는 게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의 주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즉, 이해당사자가 운동의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을 조직하는 게 당의 정치활동의 기본으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유권자들이 정당의 크기, 즉 당선 가능성이라는 잘못된 잣대를 버리고 당에 대한 지지율과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일치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당의 위기를 둘러싸고 ‘아래로 내려가기’, ‘아래-위 소통하기’가 열풍인 듯하다. 분명한 것은 대중과 접촉면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어떤 무기가 필요한지, 무기를 갖추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야 하며, 상담능력, 피해실태 조사 등 체계적인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선행 준비가 안 된 주먹구구식 접근은 또 하나의 이벤트를 만들 뿐이다. 어떻게 민생사업을 추진할 것인가? 어떤 무기로 어떤 실태로 접근할 것인가? 일반적인 원리는 필자의 경험을 통해 대략 밝힐 수 있다.

첫째, 이해당사자는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있을 때 참여한다.

당의 대부분의 사업은 실제 이해당사자들이 빠진 채, 무슨 단체, 무슨 협의회, 무슨 연대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곤 한다. 또는 이해당사자를 대표하는 소수와 연대하여 사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의 사업은 지속성을 가지기 어렵다. 사안별 협조가 끝나면 많은 구성원이 사라진다. 가장 큰 맹점은 ‘그들만의 리그’의 한계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평가와 정리가 적당한 수준에서 자기만족적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운동본부는 무자비한 빚 독촉과 빚 규모에 질린 과중채무자들에게 상황별 대처법과 채무를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왔다. 지난 1년간 길거리 상담과 나홀로 빚 탈출 강좌를 통해 이해당사자들의 구체적인 고통을 해소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상담을 통해 신뢰를 받는 과정은 가시적 이벤트나 연설회, 유인물 살포 등의 대중적 접근 방식보다 훨씬 힘들다. 먼저 상대방의 피해 호소를 알아들을 수 있는 법률적 지식이 필요하며, 끈질긴 질문공세에도 포기하지 않는 성실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서민의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일차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민생정책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며 관념성을 극복할 수 없다.

상담에서 제도개선까지

2001년 당시 민주노동당이 원외정당으로 국회를 압박해 상가임대차보호법을 제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상적인 상담활동이 먼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담활동을 통해 신뢰를 형성한 뒤 이해당사자로 하여금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과정을 만들었다.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민원 내기 운동과 법안 설명, 제정 반대의원 규탄집회 등으로 의원들을 압박했으며, 지역별로 국회의원 지역구 사무실 방문하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영세자영업자들은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운동 과정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시민단체를 압박해 개정운동에 나서도록 했다. 상가법 제정의 과정은 이해당사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대중 있는 대중운동’의 모습을 만들었다.

둘째, 이해당사자가 제도개선운동에 주인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해당사자들의 결합은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유인물 한장 보고, 무슨 정책을 보고 호감을 느껴 바로 결합할 이해당사자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일차적인 신뢰형성이 필수조건이다. 이러한 신뢰형성과정에 필수적인 게 바로 상담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정보의 부재 속에 무차별적인 전화 빚 독촉, 법적 조치를 매개로 한 협박, 임금 가압류, 임대보증금 가압류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당은 채무자들과의 상담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피상담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만들 수 있다.

지난 1년간의 나홀로 파산신청 강좌, 길거리 채무상담의 교훈은 실질적인 도움을 이해당사자에게 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민주노동당이 입법 발의한 파산법 개정안, 파산선고 후 불이익 폐지를 위한 개정법률안 제출 등은 민생사업이 상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하는 제도개선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렇듯 상담의 기능은 이해당사자와의 신뢰형성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법제도와 현실간의 문제점 파악을 통한 정책개발의 근거가 되며, 여론 수집의 창구, 정책 지지자 조직을 만들 기본이 될 수 있다. 일차적인 것은 무슨 거창한 정책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안고 있는 당장의 고민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기적 제도개선을 위한 정책지지자들을 조직할 수 있다.

직접 참여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셋째, 서민들의 목소리로 정책평가, 활동평가를 받자.

상담이 만능은 아니다. 상담을 통해 형성된 우호 대중이 참여하는 정책 지지자로 발전하는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와 기획 등이 각 활동에 반영되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민주화운동부는 이해당사자들이 당의 정책과 활동을 평가하도록 올해 초부터 다섯차례 민생포럼을 진행했다. 이해당사자들이 고통받고 있는 공공임대주택 관리 문제, 부도임대아파트 문제, 대형유통업체의 진출과 영세상공인의 문제 등에서 이해당사자들은 당의 활동과 정책을 묻고 국회의원과 해당부서에 의견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해당사자들의 참여평가과정이 만들어질 때 민주노동당식 민생활동이 가능하다. 당이 사회적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들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실천 활동을 진행하고 이를 통해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

정책정당, 민생정당으로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당 차원에서 이들의 권익을 위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실천활동을 적극적,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당이 서민의 고통을 해소하는 실천 활동에서 헤게모니를 쥐는 경우 보수정당이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유력한 무기를 갖는 것이고 이는 곧 국민의 참여 속에 정책대안의 실현과정을 통일시키는 과정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 길이 민주노동당 최대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방법이다. 당의 위기는 잠시 원내진출에 우쭐하여 내리박기식 정책을 민생정책으로 포장하는 과욕을 국민들이 심판한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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