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의 진보정당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 한발 비켜 서 있던, 아니 수많은 선배,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받아들였던 생활인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접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믿는 구석이 몇가지가 있었기에 다시금 이 길에 들어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불협화음'도 믿는 구석이 됐다

우선 이전의 진보정당과는 확연히 다른 민주노동당의 건설과 운영과정을 믿었기 때문이다.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우리 진보운동의 과제가 전체 진보진영의 동의 하에 진행된 건 사실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가졌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의 백기완 민중후보운동과 1988년 민중의당, 1990년 민중당은 진보진영 전체의 합의와 동의가 아니라 진보진영 일부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그 시도의 적극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태생적인 한계를 가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또한 진보진영의 튼튼한 토대인 노동자, 농민 등 기본계급 대중조직의 동참 또한 이끌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건설되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달랐다. '정파연합당'이라고 불리며 그로 인한 갖가지 불협화음을 내는 민주노동당의 구성과 민주노총과 전농의 조직적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은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쉽게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창당한 지 이제 6년, 아직은 사람들의 눈에 의석수 9석의 군소정당으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누구도 감히 민주노동당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비록 위기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흔히 하는 말로 위기는 기회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던가? 선거가 끝나도 해산되지 않고 오히려 당원수가 더 늘어나는, 살아 있는 진보정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행복이다. 물론, 살아 남은 것에 만족하고 초심을 잃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겠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50년 걸렸습니다”

2002년 겨울, 진보정당의 대선후보가 처음으로 TV토론에 출연하던 날.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KBS 앞에 모인 당원들과 지지자들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열성적인 당원들과 드러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위해 성원을 아끼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진보정당의 후보가 여당과 제1야당의 후보와 함께 대등한 자격으로 공중파방송의 토론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모르는 국민들이 거의 없겠지만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주노동당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생소한 정당이었고 ‘권영길’이라는 정치인은 더욱 더 그랬다.

당연히 선대본 활동의 많은 부분도 어떻게 하면 민주노동당을 더 많이 알려낼까 하는데 모아졌다.

97년 대선 당시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였던 권영길을 언론에서 한번이라도 더 다루게 하기 위해 언론사 기자들과 데스크에 매일 아침 장미(당시 ‘국민승리21’의 상징) 한송이를 일일이 배달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법정 홍보물을 제작하면서 홍보국 사람들의 고민의 초점도 그 부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더 알려낼까?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당명이 후보 이름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 선거 포스터였다.<사진> 보통 선거 포스터에는 당명은 조그맣게 넣고 기호와 후보의 이름을 크게 넣는 게 일반적이었다.


선거 포스터 시안을 선관위에 제출하고 나면 다음날 조간신문 1면에는 각당의 포스터 디자인이 사진으로 실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열성적이기로 유명한 우리 당원들은 어김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화로 알려주셨다.

“당명을 너무 크게 넣으니까 후보 사진이 타당 후보들보다 작아지지 않았냐, 당명이 너무 커서 디자인이 촌스럽다, 아니다, 후보보다 당을 부각시키는 게 우리당 정신에 더 부합되니까 잘했다.” 등등…. 어쨌든 당과 후보를 최대한 알리면서 디자인도 세련되게 홍보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 홍보 일꾼들의 커다란 숙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기호4번?

당시의 선거법에서 후보의 기호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에게 먼저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다음은 원내 의석수에 따른 순서로 번호를 주었다. 원내의석이 없는 정당들의 경우는 당명의 가나다 순으로 기호가 주어졌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 민주노동당은 아무리 빨라도 기호5번 이상이 되리라고 예상되었다. 의석은 없지만 출마가 거의 확정적인 정당들 중에 스님이 후보로 나온다는 ‘국태민안호국당’ 등 우리보다 가나다 순이 앞서는 정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기호가 확정되어 미리 홍보물의 인쇄가 가능한 원내 정당들에 비해 그 많은 양의 홍보물을 며칠 밤낮으로 찍어야만 하는 우리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예상 가능한 기호5번부터 7번까지의 필름을 출력해서 인쇄소에 가져다 놓았다. 후보 등록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기호를 확인하기 위해 중앙선관위에 전화를 한 필자는 우리가 기호4번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알고 보니 ‘국태민안호국당’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식 당명이 아니라 약칭인 ‘호국당’으로 등록을 해서 우리가 어부지리로 4번이 되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기호4번으로 다시 필름을 뽑으면서도 우리는 뜻밖의 행운에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TV 3자토론에 나가면서도 의석 1석의 ‘하나로국민연합’의 이한동 후보에게 기호3번을 내주고 뒷번호로 밀림으로써, 자칫 군소 후보의 이미지로 비치게 됐는데 그나마 한 자리라도 앞선 번호를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감독이며 당원인 박찬욱 감독과 민주노동당 지지자인 탤런트 정찬씨가 직접 출연해서 ‘4번타자 권영길’을 지지해 달라고 한 TV광고의 홍보문구도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국태민안호국당’은 왜 그랬을까?

직접 해서 아낄 수만 있다면

보통의 경우 법정홍보물의 제작은 전문 정치기획사에 의뢰해 제작한다. 정치기획사들은 후보의 코디, 사진촬영에서부터 홍보물의 컨셉과 카피는 물론 원고까지 작성해주고 디자인에 제작, 각 지역 선관위까지의 배달까지 모조리 대행해 주지만 대신 상당한 비용을 청구한다. 매달 꼬박꼬박 당비를 내는 당원들이 선거 때만 되면 또다시 10만원씩, 20만원씩 특별당비를 내서 대선을 치러야 하는 민주노동당에 그만한 재정이 있을리 만무했다.

대선에서 허용되는 법정홍보물은 선거 포스터 1종과 4쪽 선거전단, 16쪽 책자형 소형인쇄물 각 1종씩인데 우리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 때문에 보장된 양도 채우지 못하고 포스터와 2쪽, 4쪽의 홍보물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97년 대선 때는 포스터와 2쪽 흑백 홍보물을, 그것도 전국의 모든 유권자가 아니라 도시와 공장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배포할 수밖에 없었던데 비하면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대신 전제가 있었다.

정치기획사에 맡기지 않고 디자인에서부터 제작, 배포까지 우리가 직접 다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중앙당에 매킨토시 컴퓨터 한 대를 갖다놓고 자원활동을 결의한 디자이너 2명이 밤낮으로 법정홍보물뿐만 아니라 모든 선전물을 편집하고 한 명은 원고 쓰고 필자는 아예 인쇄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홍보물을 무사히 제작했지만 이제는 각 지역 선관위까지의 배달도 우리가 직접 해야 했다. 총 1,700만부, 520여톤의 홍보물을 전국 244개 선관위까지 보내는 일은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택배로 보내면 편하지만 정해진 시간까지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 택배의 경우 약 8천만원이 드는데 우리가 직접 보내면 3천만원이면 가능했기 때문이다. 트럭 기사분들에게 각 지역의 배송 책임을 맡은 우리 당원들의 연락처를 들려서 보내고 중앙당 조직실에서는 운송 상황을 책임진 당원들에게 중계하는, 말 그대로 ‘007작전’이 진행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아마 내년의 지방선거에서도 재현될 것이고 다음 대선에서도 그럴 것이며 당분간은 계속 그렇지 않을까? 힘들지만 당의 재정을 아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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