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다급해진 마음으로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나의 마음은 너무도 시렸고 미어졌다. 치기어린 감성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조차 참담할 정도로 노동운동 활동가로서 그의 나이 마흔의 경제적 궁핍함은 그가 생전에 발이 부르트게 쫓아 다닌 높디높은 은행 문턱의 전세보증금 오천만원의 후미진 아파트와 남겨진 아내와 두 아이가 전부였다. 난 그의 15평 아파트에서 그의 죽음을 목도하며 부당해고 후 그가 홀로 견디어 왔을 싸움에 함께 하지 못한 내 청춘의 옹졸함을 보았다.

작년 겨울 속초의 연수원에서 현장교육사업으로 그와 만났을 때 3박4일의 교육기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할 텐데 아이들이 보고 싶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가을하늘 같은 웃음으로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정형화된 업무에 매달리는 것보다 현장과 함께 하는 것이 내 운동의 자양분”이라고 말하던 그의 대답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기만 한데.

고 민한홍 동지의 죽음 앞에 우리는 무엇을 했나

그가 대학 졸업 후 현장에 투신한 후 청춘을 담아내던 운동조직에서 불명예스럽게 해고당한 뒤 홀로 1인시위투쟁을 하는 그와 사무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보증 없이 전세대출금을 저리로 구할 수 있는 은행을 물어 왔다. 자본에 근착하지도 않은 내게 그의 절박한 질문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도 못할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해고 후 그의 싸움은 늘 외로웠고 고단했다. 부당해고 철회하고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주체가 자본도 정권도 아닌 동지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나 홀로 사무실 건물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그를 보며 오고가며 건네는 동지들의 힘내라는 덕담은 우리 활동가들의 한계였고, 스스로에 대한 위로였다. 그리고 그는 하반기 투쟁으로 분주하던 우리의 일상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그토록 염원하던 복직의 꿈과 명예회복도 이루지 못한 채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의 죽음을 두고 어떤 이들은 ‘노총이 가뜩이나 어려운데 니들까지 나서서 조직적 분열을 야기하면 되겠는냐? 지금은 안 된다. 이건 적전분열이다’라며 그의 죽음 앞에 조직적 단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린 과연 그들의 말처럼 계급적으로 단결했는가? 노동조합 안의 민주성이 목숨 걸고 부여잡을 수 있는 원칙으로 세워졌는가? 채용직 간부들에 대한 동지애적 관점은 지켜지고 있었는가?

솔직해지자. 고 민한홍 동지가 스스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 앞에 민주노조운동의 원칙과 기풍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서로간의 미미한 갈등을 조직 내의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해결해야 될 자주성은 사라지고 정부가 만든 법제도에 그의 부당해고를 의뢰하는 처참한 현실이 그의 죽음을 내몬 것이다. 계급성, 연대성, 민주성 그 어느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채 진행된 부당해고 앞에 나이 마흔의 그는 치욕스러웠을 것이고 분노했을 것이다. 활동가로서 참을 수 없는 조직 내의 현실이 그의 죽음을 야기시킨 것이다.

어쩌면 채용직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의 영원한 희생물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노동이 희망인 나라를 세워내기 위해 운동에 헌신해 왔지만 돌아온 것은 끊임없는 희생과 자기 감내뿐이었다. 조직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는 동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언제고 직원 취급이었다.

한줌밖에 안 되는 열악한 조직률 속에 가야 할 산별의 길과 계급적 단결의 과제는 멀기만 한데 우린 아직도 분파적이며 이기적이다. 날로 지능화되고 거대해지는 자본과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계속해서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내부가 단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본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동지적 신뢰마저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용직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의 영원한 희생물인가

고 민한홍 동지의 죽음 앞에 우리를 돌아보자. 오늘날 노동운동은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 과연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해고되면서 얻고자 했던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은 어디까지 와있는가? 늘 연례행사처럼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투쟁을 되풀이해 온 한국 노동운동이 과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있는가.

이같은 물음에 “예”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은 아직도 멀고 먼 피안일 뿐이다. 노동운동은 ‘때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운동으로서의 정당성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돌이켜보자.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은 ‘가진 소수의 비도덕성’을 질타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다수의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왔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위기를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어느새 ‘또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으로 바뀌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이는 단순히 자본측과 보수언론의 왜곡된 보도 때문만은 아니다. 이같은 위기 상황의 까닭을 국가와 자본의 탄압 또는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행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수긍할 수 있는 손쉬운 책임 회피의 답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외부의 요인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조건일 뿐이다. 변화하는 상황에 탄력있게 대응하여 살아남아 풍성한 열매를 맺느냐 아니면 도태되어 멸종되느냐 하는 것은 거의 모두 주체의 문제이다. 위기의 1차 원인은 노동운동 자체의 내부 요인에 있다.

일찍이 1960년대 말 폴 바란과 폴 스위지는 선진국 노동자들은 제3세계를 착취한 잉여의 떡고물로 사육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제3세계의 굶주림과 불평등, 착취의 참상은 늘어가는 반면 선진국 노동자들은 혁명성을 상실한 대중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더 확대해보자. 오늘날 노동운동은 활동가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세워져 왔다. 단계별로 성숙되어지고 숙주되어진 노동계급의 발전과정에 운동이라는 끈을 부여잡고 일상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불안정성을 감내하는 수많은 활동가들의 애정이 있어 왔다.

고 민한홍 동지 앞에 통렬한 자기반성부터 해야

고 민한홍 동지의 죽음 앞에, 그대 아직도 체 게바라를 꿈꾸는가란 질문에, 당당한 답변을 해줄 활동가가 얼마나 있을까 싶다. 성공한 쿠바혁명의 장관자리를 뒤로 하고 자본과의 전쟁을 통해, 분노의 무기를 통해 혁명을 꿈꾸었던 체 게바라의 청춘을 감내할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이익과 공포로만 움직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기에 진보학자 출신 노동부장관의 안빈낙도 발언으로 성내지 말고 노동운동의 내부검열과 고민으로 돌아보았으면 한다.

노동자 우리 안의 독선과 이기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치외법권이며 성역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비정규 동지들의 절망의 몸부림에 자유로울 정규직 노동계급은 그 얼마나 되나. 자본과의 생존의 줄다리기 끝에 신자유주의 정부와의 일대결전을 통한 혁명이 아니라면 노동계 내부의 계급적 단결에 대한 자정 노력과 헌신성의 회복이다.

이 땅의 비정규직 문제는 어설픈 자유주의자들의 광란의 드라이브에서 촉발된 문제지만 끝자락의 말미에는 정규직의 기득권도 문제이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단결이 깃발만 나부끼는 투쟁이었음이 더 큰 문제 아니었는가?

독설을 뱉어보자. 차별과 독선을 방기하는 정규직노동자의 기득권 사수의 자본 따라하기 행태는 결국 타인의 투쟁이 되어버린 노동운동의 자화상이 아니었는가? 더 나아가 직원으로 취급당하는 채용직활동가들의 현실은 노동운동 조직내의 파시즘이 아니었는가?

고 민한홍 동지의 죽음 앞에 “우리가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피맺힌 각성이 노동계 우리 내부에서 치열하게 먼저 나와야 한다. 죽은 사람 얘기도 한 시간 소일거리인 무덤덤한 세상에서 귀하디 귀한 동지들 떠나보낸 조직 내의 비민주성에 대해 통렬한 자기반성의 선언을 이제 해야 한다.

현실을 보자. 우리 사회의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차별과 차이의 벽은 이미 도를 넘었다. 그것이 시장만능주의에 함몰된 정부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그 벽을 허무는 것은 우리 노동자의 몫이요,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몫이다.

용기 내어 고백하자. 날로 증가일로에 있는 이 땅의 비정규노동자의 문제,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체온없는 신자유주의 공세의 가슴 처연한 그늘이기도 하지만 고 민한홍 동지의 죽음 앞에 노동의 희망을 소리 내어 노래하지 못하는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분명 존재함을 말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