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가 5만여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으로 부활한 88년 '전태일열사 18주기 추모 전국노동자대회'-사람들은 이날 노동자대회를 '노동자계급의 영웅적 투쟁'이라 표현했다.

전태일 열사의 30주기가 되는 올해 정부는 노동계가 '진지조항 등 외국자본투자기업에 대한 노동기본권의 심각한 침해가 예상된다'며 반발하고 있는 한일투자협정을 연내 체결하겠다고 발표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해인 70년 1월1일 정부는 외국자본유지를 위해 외국기업에 대한 노조결성 및 노동쟁의를 규제하는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조정에 관한 임시 특례법'을 발표했다.

30년의 시차를 넘어 보다 세련돼진 정부와 여전히 절박한 노동기본권의 사이에는 세월의 두께가 얇아 보인다.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계승된 전태일 정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30년. 그 세월동안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1번의 장례식과 29번의 추모식'을 치르며 노동운동과 역사를 같이 해왔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던져준 사회적 충격 속에 그해 11월 18일, '아들의 뜻이 이루어 질 때까지 장례식을 치루지 않겠다'는 이소선 여사의 의지 그리고 노동자, 학생, 종교인, 지식인들의 투쟁으로 사회장이나 다름없이 장례식이 치뤄졌다. 그러나 72년 시작된 유신독재의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과 노동운동 탄압은 전태일에 대한 억압이자 탄압을 의미했다.

전태일은 75년 다시 부활했다. 75년 청계피복노조를 중심으로 당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5주기 추모위원회'를 조직했다. 유신독재의 혹독한 탄압을 뚫고 평화시장의 노동교실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전태일 열사를 노동현장에서 부활시킨 것이다. 그 후 전태일 열사 추모식은 매 해 유신독재에 대한 규탄행사로 이어졌다.

80년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전태일을 다시 암흑 속으로 가뒀다.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으며, 이 때 81년 1월 청계노조 강제해산 되고 이소선 여사를 포함한 11명의 간부들이 구속되고, 청계피복노조도 불법화 됐다.

그러나 82년 각계 인사들이 '전태일 기념관 건립위원회'를 만들었고, 83년에는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주축이 된 '전태일동지 13주기추모위원회'가 결성돼 새로운 투쟁의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13주기 추모식은 이듬해 4월 청계피복노조 복구와 14주기 추모식으로 이어졌다. 84년 9월 '청계피복노조 합법화'를 슬로건으로 대규모 노학연대투쟁이 전개되면서 청계피복노조는 새로운 투쟁의 구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청계피복노조 합법화투쟁은 네차례에 걸친 서울시내 가두투쟁으로 이어지며 '전두환독재 타도투쟁'으로 발전한다.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태일 열사와 노동운동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계기가 됐다. 당시 결성된 노조들이 주축이 돼서 모인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는 전노협 결성을 위한 첫 회의와 18주기 추모식을 겸해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를 열었다. 88년 일이다.

이 땅에 노동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 5만여 명이 모여 집회를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한 그날의 행사를 놓고 사람들은 "노동자계급의 영웅적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이소선 여사는 "우리 태일이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전태일이여"라고 감격스러워 했다. 그 후 전태일 열사 추모식은 '전국 노동자대회'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탄압과 성장하는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한 해의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자리가 됐다.

전태일 열사 뜻 기려 전태일 노동상 제정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를 편집인으로 83년 출간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저자를 밝히고 '전태일 평전'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는 암울한 시대를 상징한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이 책은 91년에야 '전태일 평전'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전국노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한 88년 18주기부터 전태일노동상을 '전태일 열사의 위대한 뜻을 길이 받들고, 살아있는 노동운동의 모범을 널리 빛냄으로써 사회발전의 기본동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노동운동이 전태일 정신에 따라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도록 지지, 격려한다'는 취지로 제정했다. 전태일노동상은 △철저한 조직성 △치열한 투쟁성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에 기초한 헌신성 △노동운동과 전체 민중에게 끼친 기여도 등의 4가지 기준을 통해 선발되며 올해까지 총 9회에 걸쳐 12개 단체와 3명의 개인이 수상했다. 현대엔진에 노조를 결성했던 권용목 전 현대엔진 노조위원장이 1회에, 최초의 지역노조협의회를 건설한 마창노련과 89년 결성된 전교조가 2회, 90년 건설된 전노협이 3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올해는 보건의료노조 차수련 위원장과 호텔롯데노조가 오는 11일 수상하게 된다.

조직노동자, 47만3,000여명이 148만여명으로 증가

그 사이 한국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남한의 인구는 3,150만에서 4,700만으로 늘었고 1인당 국민총소득은 249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96년 1만1,380달러를 정점으로 99년 8,581달러를 기록했으며 국내총생산(GDP)도 2조7,252억원에서 483조7,778억원으로 비교할 수 없이 성장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노동소득 분배율은 70년 41.1% 99년 59.8%으로 상승했으며 전체 조직노동자 수도 47만3,000여명에서 99년 양대노총 총 148만여명으로 증가했다. 주당 근로시간은 전산업 51.6시간, 제조업 53.4시간에서 각각 47.9시간, 50시간으로 줄어들었다. 70년 11월의 전산업 평균임금이 1만8,753원이고 제조업 평균임금이 1만5,220원이었던 것이 올해 8월 전산업 175만644원과 의류제조업체 107만3,893원으로 집계됐다.

'광야를 불태운 한 점 불꽃'

그러나 노동자의 현실은 더욱 어려웠다.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를 보면 재단사는 3만원, 미싱사가 1만5천원, 시다가 3천원을 한달 임금으로 받았으며 하루 14시간 이상을 한 달에 2일 밖에 쉬지 못한 체 일해야 했다. 전태일 열사는 시다공의 수당을 50%이상 인상해주고 작업시간을 10시간∼12시간으로 줄여달라고 진정했다. 95년을 100으로 놓고 비교할 때 생활물가지수가 올해 10월 135.6이고 1970년 1월이 8.5였으니 시다공 월 임금을 약 16배로 단순비교해 보면 지금 가치로 4만8,000원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70년에는 임시고용직과 일용직으로 대표되는 비정규직의 비율도 전체 노동자 378만6,000여 명 중 40.9%에 달했으며 도시인구의 급증과 경기침체 등의 요인으로 불완전취업을 비롯한 실업이 광범위한 상태였다. 70년대 이러한 상대적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속에서 고통받았던 비정규노동자는 IMF위기를 거치면서 현재 전체노동자 1,339만3,000여명의 52.7%에 달한다. 비정규노동자의 임금도 정규직에 비해 임시직이 56.2%, 일용직이 57.8%에 그치고 있으며 4대 보험의 미적용율도 고용보험은 39.2% 의료보험은 41.3% 국민연금은 42.6%, 산재보험은 58.4%에 이르고 있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외자유치를 통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물리적 폭력 속에 숨죽이고 지내야 했던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를 경험하면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전태일 정신은 '광야를 불태운 한 점 불꽃'이었으며 억압과 회유 속에서도 노동운동의 밑바닥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는 깊은 강이었다. 전태일 열사 30주기를 맞아 노동계는 전태일 열사를 되살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구조조정의 한파 앞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들, 비정규직의 한계를 딛고 스스로를 조직해가는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또다른 '전태일'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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