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묻혀버린 전태일, 그러나 어려울 때 생각나는 이름

운명의 날, 동료들과 함께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기로 한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 시장 경비대와 경찰의 삼엄한 경비망이 펼쳐진 가운데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긴 뒤, 거리로 내달렸다.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내죽음을 헛되이 말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 그러나 일상에 묻혀버린 전태일

사실 전태일 열사 기일이 되면 어김없이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으로 시작되는 전국노동자대회를 한다. 벌써 10년을 넘게 지속돼온 행사다. 그러나 그날을 열사의 기일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해마다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로서. 그저 '또 하나의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사실 평소에 잊고 지낸다. 언뜻 언뜻 영화 전태일을 생각하며 스스로에 채찍질을 하지만 금방 다시 잊어버리는 게 사실이다."

"사실 오늘 조합원 모아 놓고 집회를 하면서 노동자대회에 최대한 많이 참여하자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기일이 다가왔다는 생각도 잊고 있었고 평상시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무감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규직, 특수고용관계, 계약직, 퇴출업체에서 실직위기에 놓인 노동자들은 전태일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2000년 오늘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구호를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어려울 때 생각나는게 전태일 열사의 정신인가보다.

* 전태일 사후 30년, 아직도 벌어지는 '근로기준법 화형식'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30년이 된 어느 날,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열리고 있었다. 새 천년을 훌쩍 넘어섰는데 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생전 있는지조차 몰랐던 IMF체제를 겪으면서 노동자들이 대거 길거리로 쫓겨난 지 2년 뒤인 올 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전체 임금 근로자의 52%를 넘었다.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더 많아 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절반이 넘는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은 실질적인 울타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불 태울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과, 우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지금 우리의 노동 현실이 너무나 똑같다." 지난 9월30일 비정규직 문화제에 참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원의 한 노무사사무실에서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손씨도 어느 때보다 30년 전 전태일 열사가 생각난다고 한다. "지금도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있으나 마나한 현실이다. 법이 있어도, 있는 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게 현실이다. 고용형태가 더욱 불안해 지는 요즈음 전태일 열사가 외쳤던 구호가 훨씬 절실하다. 제발 있는 법이라도 잘 좀 지켰으면 좋겠다."

*어려울 때 더욱 절실해 지는 전태일

"대우차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불씨가 된 전태일이 다른 때 보다 더 생각난다. '지금도 이렇게 어려운데, 아직도 이렇게 힘든데...'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생각하면 처음 불씨가 되었던 전태일 열사한테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다." (최근 최종부도가 난 대우차에서 '해외매각반대' 투쟁을 벌이다 올 여름 해고된 노동자의 부인 김씨)

"올 초 노동조합을 세우기 전까지만 해도 병역특례라는 이유만으로 월급을 착취를 당해야 했던 그 노동자들이 이제는 어였한 조합원으로 진정한 노동자로 서 있습니다. 지금 회사에서는 연봉제니 능력급제니 해가며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이간질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들 어린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얘기를 전하고 자 합니다. 당신이 살아오신 길을 이야기하며 참된 노동자로의 길을 말할 것이고 당신이 투쟁해오신 길을 이야기하며 이제 우리가 굴려야할 덩이를 찾고자 합니다." (전태일 홈페이지에 실린 김씨의 글)

"노동자를 위해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끝내 거룩한 죽음을 택했다. 계약직 노동자들이 목숨까지 버리진 못할지언정 권리확보를 위해 선두주자 역할을 할 자세가 돼 있다. 현재 계약직 1만여명을 비정규직으로 바꾸려하고 있고, 전화교환원 5,000명 중 1,800명이 계약직인데 이 부분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바꿨다. 이런 불함리함에 맞서 계약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나가겠다."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조합 대전충남 이춘하 본부장은 그것이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태일, 그 이름앞에 더욱 부끄러운...

"30년이 흘렀는데 그 때 열사만큼 치열하지도 못하고, 그걸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죄송하다. 부딪치는 현실은 암울한데 조합활동은 형식적으로 흐르고 제대로 세워내지도 못하고 있다. 열사를 대할 면목이 없다."(대우차 협력업체 노조위원장 이씨)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교묘하면서도 치밀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이 시대에도 전태일이 필요하다. 지금은 한 명의 전태일이 아니라 전태일이 산산히 부서진 조각 모두가 한사람 한사람의 전태일로 부활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전태일이 되어야 한다. 많이 부끄럽다.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것이다."('회사측의 감시와 통제, 노조탄압이 계속되고 있다'는 현대중공업 이재관씨)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당시 나보다 어렸었다는게 새로울 때가 있었다. 열사가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그 때보다 많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근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고 내 몫인 것 같다."(지금은 늙은 학생이 된 노동자 신씨)

"당시 독재체제, 그로 인해 사회전반이 대단히 암울했던 그 시절에 아무도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열사는 분신을 했다. 그건 어쩌면 가장 절실한 '인간 선언'이었다. 평소에 비록 잊고 지내지만 기일이 될 때마다 현재의 상황을 반추하고, 전태일을 통해 당시나 지금이나 공통적으로 맞딱드리는 사회문제나 과제를 되새기게 만드는 게 지금이라고 본다." 이렇게 말하는 인천 조봉호씨는 자신의 농성장에 전태일 얼굴이 담긴 포스터를 붙여두고 스스로를 되새긴다고 한다.

'전태일 30년, 그 이름 앞에 당당하고 싶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으로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 열사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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