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0일 한국노총은 대학로에서 ‘비정규직 보호입법 쟁취’와 ‘일방적 노사관계 제도개편(로드맵) 저지’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

이를 위해 총연맹은 지난 7~8일 여주 중앙교육원에서 전국단위노조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총력투쟁을 결의하는 한편, 지도부의 지역 순회 교육을 실시하고 산별노련 등 산하 전 조직을 투쟁상황체제로 전환해 총연맹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며 성공적인 전국노동자대회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현장의 많은 노동자들은 이번 대회의 의미와 중요성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여 안타깝고 답답할 따름이다. 물론 현장 활동가들의 관심과 열정이 일면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현장 노동자의 저변에 깔려 있는 ‘나와는 당장 무관한, 내가 아니어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나설 문제’라는 인식 때문인 탓도 크지 않나 싶다.

정규직의 권리보장은 비정규직 차별철폐에서부터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 정녕 당장 나와는 무관한 문제일까? 또 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해결해 줄 문제일까?

우리나라 전체 임금노동자의 57%가 비정규직이라 하고, 정규직의 60%에 불과한 임금을 받고 있다 한다. 비정규직이란 말은 단지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라는 의미를 넘어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조차 보장되지 않고 노동의 숭고한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마저 한낱 헛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케 하는 괴물인 것이다.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처절할 만치 안타까운 사연들은 언론을 통해 이미 많이 회자되고 있어 그 고통의 무게를 짐작하고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이 비정규직이 아닌 것에 안도하며 한편으론 정규직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형국이다. 때로는 비정규직과의 차별이 불가피한 것으로 애써 자위까지 하면서.

그러나 정규직의 권리는 비정규직과의 이분법적 진입장벽으로는 결코 보장받을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하다. 비정규직의 수는 이미 정규직을 압도하고 있고 정규직의 자연퇴직 등은 정규직 감소와 비정규직의 증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는 정규직 노동자의 고립을 자초하고 결국 노동운동의 쇠퇴를 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들불처럼 번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투쟁은 노동운동이 독재정치가 극치를 이루었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하에서 오히려 대도약을 이루었던 것에서 보듯이 잡초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결국엔 승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사회전체가 단 한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단언컨대 정규직의 권리보장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미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 중 몇몇은 비정규직의 족쇄가 채워져 있으며 그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또한 우리 후손은 필연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해도 과언이 아닌 꼴이 됐다. 비정규직이 날로 확산되어만 가는 지금의 구조를 깨지 않는다면 비정규직의 문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회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가정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비정규직의 문제에는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의 안정적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세대간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아니어도…’라는 인식부터 버려야

지금 우리나라 기업들은 저마다 사상최대의 수익과 현금보유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료 체납세대가 90만에 육박하고, 한해 1만명 이상이 생계를 비관해 자살하는가 하면, 청년실업률은 8.3%를 넘고, 상하위간의 월평균 소득격차는 십수배를 넘어서고, 비정규직은 850만명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도대체 제정신인 나라인가?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고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빈부격차는 커져만 가고 고착화 되어 가고 있다. 사상 유례 없는 무역흑자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내수침체로 인해 국내경기는 도저히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철저히 희생해야 하고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의 신분으로는 건전하고 꾸준한 소비를 애초에 기대할 수 없으며, 비정규직의 생활이 안정되지 않고는 사회양극화 해소는 요원한 구호에 불과할 따름이다. 다수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성장의 모든 과실을 소수만 독점하는 잘못된 구조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국제수지가 아무리 좋은들 내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성장은 물론 사회통합 또한 기대할 수 없다.

2007년부터 시행될 복수노조 허용,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대체근로 전면허용, 직권중재 확대실시 등 노동운동의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노사관계 제도개편(로드맵)’ 또한 결코 녹녹치 않은 문제들이다. 특히나 노동조합을 직접 끌고 나가야 하는 현장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보통 관심 있는 게 아니다. 노동조합 운영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임에도 직접 나서서 협상의 주체가 될 수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상급단체인 총연맹의 협상과정을 언론을 통해 곁눈질하며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다.

차라리 조합원에게 당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문제라면 사안의 중대함을 떠나 투쟁을 조직화 하는데 어려움이 적겠지만 노사관계 제도개선 문제는 일선 조합원에겐 관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현장 활동가 몇몇의 관심 사항이 되고만 것은 아닌지 하는 자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소홀한 문제일 수 없으며 현장 조합원에게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하게 하지 못한 것에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다. 혹여 현장 활동가들 중에 ‘내 임기 중에는 별 문제 아니다’라거나, ‘노동계 전체의 문제이니 만큼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는 감히 없을 것이라 믿고 싶다.

사용자의 대항권 강화를 통한 노동의 무력화가 주된 내용일 수밖에 없는 작금의 노사관계 제도개편은 자칫 노동운동의 근본을 뒤엎을 만한 상황 변화를 초래할 것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결코 남에게 맡기고 무임승차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 노동계의 잇단 비리 사건들과 일부 대기업 노동조합의 이기적 행태가 연일 언론의 도마에 오르며 마치 노동계 전체가 비린내 나고 악취를 풍기는 집단으로 비쳐지고 노동계를 바라보는 시민 대중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특수고용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더더욱 수수방관할 수 없다.

언론에 비쳐지는 것처럼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사용자 그리고 수구 언론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 우리 노동자는 이미 계급적 연대로 하나가 되어 있고 또 하나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김태환, 아직 미완인 7월의 분노를 잊지 말자

그리고 지난 6월, 우리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투쟁 지원현장에서 분연히 산화해 간 소중한 현장 활동가였던 김태환 열사를 아린 가슴 속에 묻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사용자부 장관’에 다름 아닌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저희들끼리 다투다 일어난 사고’ 쯤으로 왜곡하고 폄훼하기에 급급했었다.

지난 7월에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며 ‘노동부장관 퇴진, 김태환열사 정신계승’을 소리높이며 광화문을 가득 메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환 장관은 여전히 건재한 채 까불대고 있으며, 김태환 열사가 그토록 항변하고자 했던 특수고용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지 않은가? 아직 미완인 채 끝나지 않은 7월의 분노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늦가을! 모처럼 가족과 함께 소중한 추억이라도 남겨두고 싶은 마음 간절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 후손에게 보다 떳떳한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비정규직 노동자의 족쇄는 물려주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이 희망이라 했다. 11월20일 대학로에서 우린 희망을 보아야 한다. 고사리와 같은 아이들의 손과 억세어진 마누라의 손을 잡고 노동계급적 연대를 넘어 세대의 연대로 대학로 거리를 뜨겁게 달구어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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