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APEC)의 벽은 높았다. APEC 회의 자체를 거부하는 한국의 민중진영과 달리 ‘참여를 통한 비판적 개입’이라는 입장을 정했던 한국노총과 국제노동계는 이같은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APEC 내에 ‘노동포럼’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지만 사실상 ‘어렵다’는 답변만을 들어야 했다.

이에 따라 ‘비판적 개입’ 노선을 선택했던 이들이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내놓을지, 혹은 노선 수정에 나설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노동포럼’을 공식기구로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한국에 대거 입국한 국제노동계 인사들은 14일 오전부터 서울 타워호텔에서 국제자유노련 아시아태평양 노동자 네트워크(ICFTU-APLN) 회의를 열고 최석영 APEC 사무총장을 초청해 이같은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최 총장은 “APEC의 모든 회원국들이 각 나라에 요청에 의해 공식적인 절차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의제로 채택하기조차 힘든 실정”이라며 사실상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내, APEC 내에 노동포럼을 설치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 총장은 “APEC 결정 자체가 만장일치는 아니지만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이를 결의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노사정 대화 문제 또한 회원국 간의 합의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러나 각 국가마다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차이도 큰 만큼 사실상 이같은 합의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최 총장은 “APEC 내에서도 사회안전망 구축과 노동사회 네트워크를 통해 노동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APEC 내 다른 위원회와는 달리 아직까지 구속력을 갖는 결의를 내온 적이 없다”며 APEC 내에서 노동문제를 다루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나타냈다.

그는 ‘노동포럼 설치가 어렵다면 APEC이 ICFTU를 공식 초정하는 형식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긍정적인 의견”이라면서도 “쉽지 않고 상당히 어려울 것이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APEC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가이 라이더 ICFTU 사무총장은 “여러 국제기구와 달리 유독 APEC에서만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노동포럼’을 APEC 내 공식적인 기구로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가이 라이더 총장은 “APEC은 오로지 신자유주의와 무역자유화를 위한 논의를 진행할 뿐 양질의 고용 등을 위한 노동계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비균형적인 조직”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APEC 내에 이미 설치돼 있는 기업인들의 연합체(ABAC)를 지적하며 “이같은 조직만 있고 노동계 모임은 없다는 그 현실 자체가 APEC이 얼마나 기업만을 위한 조직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다른나라 노동계 대표들 또한 “APEC 내에서도 노사정 대화가 꼭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APEC이 노동기본권 문제와 고용의 문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유무역과 개방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조직”이라는 비판과 함께 “APEC의 발전자체가 결코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의견을 함께 밝히기도 했다.

이날 열린 ICFTU-APLN 회의는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했으며 국제자유노련의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과 스즈키 노리유끼 아시아태평양지역 사무총장, 그리고 아태지역 20여개 나라의 노동단체 대표자들이 참가해 의견을 나눴다.

이들은 이날 오후 늦게 이해찬 국무총리와의 면담도 가졌으며 15일 오전 9시 서울 타워빌딩에서 공식기자회견을 열고 면담결과와 함께 채택된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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