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지방선거에서 2004년 총선까지는 민주노동당이 성공적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하던 시기였다. 반면 총선이후 불과 1년반만에 민주노동당은 ‘위기’를 말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뛰고 있는 일선활동가들은 ‘개척과 성공,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위기’까지 각각의 국면에서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왔을까? <매일노동뉴스>는 지역위원회와 시도당, 중앙당과 정책연구소에서 일하는 민주노동당 일선활동가들의 '눈물과 땀'을 각각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손은숙(29세) 부산 해운대구위원회 조직부장은 4·15 총선 이후인 2004년 8월부터 민주노동당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직장인이며, 열혈당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지역 상근자를 시작하기까지 과정, 지역상근자로 활동을 시작한 후 겪는 일상사업의 난맥과 보람들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을 것이다. -사진 밑에 붙일 설명-필자---손은숙 부산 해운대구위원회 조직부장 2002년 1월 직장을 서울에서 충남 공주로 옮기게 되었다. 난생 처음 가본 동네여서 아는 얼굴은 회사 사람들이 다였다. 놀 사람이 없고, 업무(실험실 품질관리)의 특성상 시간적 여유는 많아…, 그렇게 인터넷과 친해졌다. 나의 대학생활을 규정지었던 학생회와 사람들,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 몸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아 자연스레 나를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로 기웃거리게 했고, 그러다 ‘깨끗한 손’(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 이문옥 팬클럽)의 열렬한 ‘눈팅족’으로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됐다.시골도시 공주는 생전가도 유인물 한장 받아 볼 수 없고, 대학교 교정을 산책해 봐도 정치·사회 이슈와 관련한 대자보 한장 볼 수 없는 동네였다. 진보의 무풍지대랄까? 그것이 4년간 소시민으로 살다가 막 열렬한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된 나를 너무 갑갑하게 했다. 그 갑갑함을 깨고자, 시골도시 공주에서 유인물 돌리면 의미있는 삶이지 않을까 싶어 지방선거 후 민주노동당에 입당, 당원이 되었다. 민주노동당 입당이라는 거사(?)를 치르고 난 후 한 사나흘간 내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입당을 축하한다는 흔한 문자 메시지 하나 날라 오지 않았다. 그래서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중앙당으로 전화했더니, ‘공주는 충남도지부 소속이니 그리로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긴장된 마음으로 ‘쭈삣쭈삣’ 전화를 했더니 신기한 듯 반갑게 맞아줬던 충남도지부 이재기 사무처장님. 그리곤 나는 입당한 지 열흘만에 수안보에서 열린 ‘열성당원 전진대회’를 갔다. 나의 입당으로 공주엔 당원이 나까지 9명이었고, 자기네끼리 한번도 본적도 없다 한다. 홍세화 선생 초청 강연회 열다첫 사업으로 몇몇 당원들이 의기투합해 ‘유명 당원’인 홍세화 선생님을 초청해 ‘이 시대의 진보정치’란 제목으로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민주노동당의 존재 알리기와 더불어 그냥 연락하면 얼굴도 안 보여 주는 당원들을 끌어내고, 당원도 좀 늘려 보고자 하는 일석삼조의 야심찬 꿈을 품고.약 180여명의 사람들이 왔다. 공주대학교에서 열였기에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반 시민들도 간간이 보였다. 홍세화 선생님의 명성 덕분이었지만, 첫 사업의 흥행 성공으로 준비한 당원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전 공주농민회 회장을 하셨고, 공주지역시민단체협의회 회장을 맡고 계셨던 류근복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입당을 하셨고, 그것은 우리에게 더 힘을 줬다. 그후, 류근복 선생님을 통해 농민당원이 하나둘 더 늘었고, 특히 강연회를 열었던 공주대학교 학생당원의 수가 단 한 명에서 두 자리수로 늘었다. 그렇게, 공주 당원의 주 구성원은 농민당원, 학생당원이 됐다.“충남지부 평당원 손은숙”2002년 대선 전까진 ‘민주노동당’이라는 다섯 글자는 너무나 생소한 단어였다. 자민련의 아성 충남 공주에선 더더욱 그랬다. 사회단체의 모임이나 이런저런 자리에서 “민주노동당 당원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천년 민주당’으로 이해했다. 게다가 공주의 당체계는 어떤 직책도 없었고, 나 또한 회사를 다니며 당원들의 연락관계 정도를 책임지는 비공식 공주 연락책임자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깨끗한 손’을 통해 만난 고미숙 동지(현 중앙당 선전편집국장)의 도움으로 명함을 만들었다. 민주노동당의 색깔에 맞게, 발전소 파업 때 엄마를 따라 나온 너댓살 되는 남자아이가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머리엔 ‘매각저지’의 붉은 띠를 매고, 고사리 주먹을 들고 있는 사진 옆에 “충남지부 평당원 손은숙”이라 써 있는.공주에 다른 동지들도, 당에서 아무런 직책이 없었으니 그렇게 ‘평당원’을 내걸고 명함을 만들었다. 그 당시 지구당도 없던 공주지역의 당 활동이라는 게 사람들 만나서 ‘공주에도 민주노동당이 있어요’, ‘민주노동당은 매달 만원 당비 내는 평당원들이 이렇게 당 정책도 알려내고 활동하는 정당이에요’ 라고 자랑하는 게 다였는지 모른다.“유세트럭도 몰 수 있는 당원이고 싶었다”그렇게 ‘설렁설렁’ 당 특보나 좀 돌리고, 명함 뿌리며 민주노동당의 존재 알리는 게 다였던 우리 공주 당원들에게도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는 다가왔다. 당원도 얼마 안 되고 지구당도, 상근자도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지 않는가. 농민회에서 빌린 낡은 1톤 트럭에 합판을 세우고 ‘기호4번 권영길 후보’ 현수막 사진을 둘렀다. 정말 ‘없어 보임’의 극치였지만 그거라도 어디랴. 게다가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월차를 내고 처음 거리유세 나가는 날, 면허증 딴 지 3일 된 학생당원에게 용기를 ‘주입’시켜 공주대 근처 로터리까지 ‘위태롭게’ 유세차를 몰고 나갔다(시내까지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차를 세워두고 방송을 틀고, 당원 4명이서 춤도 추고, 기호4번 권영길을 열심히 외쳤지만, 우리의 소리는 지나가는 차 소리에 묻혀 길 건너에서도 잘 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 당의 이름과 후보쯤은 주민들이 기본으로 다 알고 있는 타 정당의 세련된 유세차가 공주 곳곳을 돌며 ‘빵빵’한 앰프 성능으로 주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민주노동당’, ‘권영길’은 생소할 따름이었고, 우리의 앰프 소리는 작기만 했다. 헌데, 그마저도 면허증 딴 지 3일된 학생당원이 충남도지부 유세단이라 딴 지역으로 간다 하여 우리는 2시간도 못 채우고 판을 접게 되었다.지금도 나는 그날의 눈물겨움을 잊을 수 없다. 2002 대선 후 바로, 운전면허! 그것도 ‘1종 보통’을 딴 것은 그날의 기억 때문이다. 유인물 돌리는 거 말고, 유세 트럭도 몰 수 있는 당원이 되고 싶었다.어쨌든, 그 뒤 유세차는 농민회의 도움으로, 합판 세우고, 현수막 두른 값만큼은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더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몰랐다.당원도, 당비도 신기했던 시절대선이 가까워져 회사 사람들에게 민주노동당 당원임을 ‘커밍아웃’ 했을 때 모두들 신기해 했다. 민주노동당은 당원들이 매월 당비를 낸다는 것도, 별로 말이 없던 부산사투리 쓰는 젊은 아가씨가 툭하면 민주노동당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생경해 했다.그런데, 당원들이 매달 당비를 내고, 선거 때면 후보자뿐만 아니라 당원들도 특별당비 내어 선거를 치른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가 보다. 아니면 현실(?)적이지 않아 감이 없었던지. 연말정산 한다고 정치후원금 영수증을 총무과에 내밀었더니 놀라했다. 내 자취방에 TV가 없다는 핑계로 첫 대선 후보 토론회를 총무과 직원집에 가서 모여 봤는데, 권영길 후보의 이야기가 너무 어려웠을까? 아니면 자신과 상관없는 먼 이야기로 여겨서일까? 토론회 시청한 뒤, ‘대통령감은 노무현이네’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정치후원금 영수증을 본 후, 그들이 내게 한 말이 ‘민주노동당 정말 멋지고 좋은 당이네요’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우리 회사사람들에겐 민주노동당의 정책보단 그런 게 더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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