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 파트타임, 임시직, 계약직..."

아마도 올 한해 노동관련 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들 중에는 이들 비정규직 관련 얘기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노동계에서는 올해를 '비정규직 운동'의 원년으로 꼽고 있을 정도다. 양대노총 모두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비정규직노조들만 해도 25곳이 넘는다. 노조뿐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전문적으로 풀어내려는 단체들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지난 5월20일 공식출범한 '한국비정규노동센터'(센터·소장 박승흡)는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단체다. 비정규노동자 실태조사, 조사연구와 정책개발을 바탕으로 한 법적·제도적 보호방안 모색, 상담 및 법률지원, 인터넷 포탈사이트 'WorkingVoice' 등 센터의 활동이 하반기 들어 더욱 왕성해지고 있다.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에 자리잡은 센터를 찾아 7인의 '비정규직 전문가'들을 만나봤다.

* "모래알 같이 흩어져있는 비정규직들, 모여야죠"

지난 3월 설립된 한국통신계약직노조(위원장 홍준표)의 사례는 센터에 있는 이들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줬다. 설립 6개월만인 지난 10월11일 한국통신노조의 규약개정을 통해 가까스로 '합법화'된 계약직노조는 이 시대 비정규직노조들의 현 주소를 그대로 드러냈다.

센터는 이처럼 올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비정규직노조들과 함께 문을 열었다. 지난 97년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조직률 감소 등 달라진 노동환경을 지켜보면서 노동조합운동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중심으로 흐르고 있는데 대한 일정한 반성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같이 하면서 센터의 설립은 조심스럽게 추진돼 왔다. 이어 지난해 9월부터 서초동에 임시사무실을 열고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창립준비위를 구성, 본격적인 설립절차를 밟아와 올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

현재 유덕상 민주노총 부위원장, 이용득 금융노조위원장, 이용식 건설산업연맹 위원장, 차수련 보건의료노조위원장 등 비정규직이 많이 포진돼 있는 산별연맹대표자들과 김선수 변호사, 윤진호 인하대 교수, 김연명 중앙대 교수 등 20명이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비정규직문제가 노동문제 뿐 아니라 인권문제, 사회문제로까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보다 다양한 인사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박영삼 정책기획국장은 "비정규직들에 대한 문제는 이전에도 부분적이고 산발적인 운동이 있어왔지만 올해처럼 체계적으로 이슈화된 적은 없었고 그런 차원에서 센터의 출범은 의미를 갖는다"며 "보통 많은 단체들이 출범초기에는 어려움을 겪게 되기 마련인데, 어찌보면 우리는 시기를 잘 맞춰 출범해 일하는데 신이 났던 것이 사실"이라고 설립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했다.

* 비정규노동자들의 목소리, '워킹보이스'

속된 말로 뜨는 패를 잡았다고나 할까? 활동을 개시한 지 반년이 되어가는 센터로서는 요즘이 수확의 계절이다.

- "어디가서 하소연할데도 마땅치 않은 것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이죠. 보다 체계적인 법률지원 서비스를 구축해 나가고 싶습니다." 꾸준히 진행돼온 상담건수가 조금씩 늘고 있다고 말한 이혜수 노무사의 표정이 밝다.

- "아줌마가 무슨 노조냐고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면 또 누가하겠냐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던 보험설계사 아줌마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주눅 들어있던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어느 해보다도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폈던 한해가 아닌 가 싶습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친구로 알려져 있는 'WorkingVoice'는 사실 센터의 출범이전부터 모습을 드러낸 베테랑(?). 50여곳을 다니면서 비정규노동자들에 카메라를 들이댄 김기현 취재편집팀장은 인상에 남는 취재가 뭐였냐고 물으니 보험설계사 해고자 엄옥남씨와의 인터뷰를 꼽았다.

지난 5월1일 노동절날 첫 선을 보인 이래 꾸준히 자료가 축적되고 있는 워킹보이스는 지난 10월부터는 커뮤니티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발적 온라인모임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 "겨울이 다가오니 일자리를 잃는 건설일용노동자들이 많아지겠죠. 이달 중으로 그간 준비해왔던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실태와 조직화방향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박영삼 정책기획국장을 위시한 정책팀은 그간의 연구성과들을 하나씩 내놓기 시작하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의 모든 것'이라는 책자를 발간,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들의 문제에 대해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하는가 하면 얼마전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모 의원실의 정책자료집 발간을 지원, 이번 노동부 국정감사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를 조목조목 짚도록 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다른 나라의 비정규직 사례를 수집하는 것도 놓칠 수 없는 과제다. 해외비정규노동자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 가운데, 일차로 미국의 비정규노동자를 둘러싼 제반환경과 운동을 소개한 자료가 나왔고 이어서 일본편을 준비중에 있다.

- "매주 서울역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을 위한 서명을 받다보면 비정규직들의 문제에 대한 여론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이런 분위기를 모아 제도가 바뀌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가야 할 겁니다" 조진원 사무국장은 법개정을 목표로 양대노총과 시민사회단체로 만들어진 비정규직공대위에서 단체들을 모아내고 연락기능을 맡는데 있어 센터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 전태일 30주기, 소외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전태일 30주기가 며칠 남지 않은 가운데 각종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추모사업회가 30주기를 맞으면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소외된 노동'에 대한 관심이다. 여성노동자, 비정규직, 그리고 영세사업장 미조직 노동자... 30년이 지났지만 불과 한달 전 비정규직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차별철폐'를 외친 바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센터가 추모주간을 맞는 각오를 남다르게 하고 있었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는 다소 추상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문제 해결방안을 아주 정확히 담고 있는 구호입니다. 올해 비정규직에 관심을 돌린 새로운 시도를 발판으로 비정규직 삶 전반에 밀착하면서 이들의 현실을 하나씩 바꿔나갈 수 있는 데 꼭 필요한 기구가 되야겠죠" 센터의 리더, 박승흡 소장이 밝힌 작지만 알찬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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