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강정구 교수 사태’가 각종 언론에서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던 때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송호근 교수의 며칠 지난 ‘중앙일보’ 칼럼을 접하게 되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성명서에 대한 반박의 형식으로 써내려간 그 글을 보면서 갑자기 뭔가 발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송 교수가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인용한 민교협의 상식적인 주장조차 비판하고 또 학문의 객관성을 주장하다가 슬그머니 ‘최소한의 예의’를 불러들이는 비일관성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의 허실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밀의 <자유론>의 소수의견 존중의 의의란

민교협 성명서에 인용된 밀의 이론은 이렇다. “어떤 의견이 강제적으로 침묵될 경우, 그 의견은 진실일 수 있다. … 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다수자의 사상이 완전한 진리이고 소수자의 그것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 다수자의 사상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며 힘을 심어주려면 항상 그것은 소수자의 반대설에 의해서 비판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밀의 자유주의가 봉건세력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이념적 무기였고 자본의 전성시대를 여는 사상적 열쇠였다고 말했다.

사실 이 말 자체가 어떤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마도 진보주의를 내세운 민교협이 부르주아의 이념인 자유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하느냐고 비난하려 했거나 아니면 밀의 논리 역시 계급적 이익에 의존한 논리로서 객관성을 지닌 논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밀이 그 시대에 소수자 의견의 존중을 얘기한 이유는 ‘다수자의 전제’를 견제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때 염두에 두었던 다수자는 다름 아닌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노동계급이었다. 결국 밀의 ‘자유론’은 보통선거권의 확립을 통해 수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될 노동계급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의 이론이 존중받는 것은 계급적 관점을 떠나서 소수 의견의 존중은 민주주의의 일반적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송 교수는 해방 이후의 역사 해석에서 학문적 자유를 방패막이로 하려면 우선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념적 혐의를 줄이기 위해 양쪽에서 같은 거리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물론 맞는 말이며 좋은 제안이다.

그런데 그 글은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흘러버렸다. 강 교수가 제시한 당시 민중의 77%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는 미군정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반박하면서, 송 교수는 “월북한 정지용이 사회주의의 진짜 모습을 알았을까?” “월북했던 임화가 간첩죄로 처형당할 때 심정이 어땠을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렇게 따진다면 다시 반문해 볼 수 있다. 좌익척결을 내세웠던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공산주의자나 반란집단으로 몰려 학살당했던 숱한 남조선 민중들은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진짜 모습을 알았을까? 암살당한 여운형과 김구의 가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쯤 되면 이제 양쪽에서 같은 거리에서 보겠다는 공언은 무의미해진 것이 아닌가? 

최소한의 권리도 없는 자유는 예의가 아니다

송 교수는 미군정의 설문조사가 사회주의가 널리 퍼져있던 서울에 국한된 것이었기에 전국조사를 할 경우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중도좌파 민족주의 세력이었던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이 대중적 지지를 가장 많이 받고 있던 전국적인 세력이었다는 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 지주-소작 관계에 기반한 봉건주의에 대한 저항이 당시 조선민중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봉건주의의 해체를 주장한 민족적 사회주의 이념들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논란들은 학술적 차원에서 보다 실증적인 입증과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밀이 강조하듯이 ‘자유로운 공적 토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반공이데올로기의 잣대로 과거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로막으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는 사실이다. 반공이데올로기는 국가보안법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이념적, 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가로막은 것이다. 더구나 현재 남한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을 내세워 현재의 잣대로 과거의 모든 역사를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조건들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친미적, 반공적 시각에 의한 편향된 역사 해석만을 교육받아왔다. 우리의 교과서는 과거사 속에서 친미 반공주의 세력들이 얼마나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악행들을 저질러왔는지에 대해서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한 역사의식은 한국사 수업시간을 늘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을 깨고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바라보려는 열린 자세에서 나온다.

강 교수의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추상적 해석에 대해 합리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해석의 근거가 된 사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다른 역사추상적 해석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나?”라는 송 교수의 반문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그는 칼럼 말미에서 느닷없이 “조부께 왜 그리 궁상스럽게 살았냐고 따질 용기가 없다”고 하면서, “후세대가 선대의 역사를 바라볼 때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사회학자로서의 객관적 거리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역사해석은 객관적 입증의 문제이지 예의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밀의 ‘자유론’의 핵심은 송 교수의 주장처럼 “최소한의 예의가 없는 자유는 권리도 없다”가 아니라, “최소한의 권리도 없는 자유는 예의가 아니다”이다. 

자유주의는 국가보안법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보수 논객들은 강 교수의 칼럼은 학문의 자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학문의 자유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한 부분이며, 학문적 규칙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특정한 권위를 부여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보장이다.

그들은 또한 강 교수의 칼럼이 선동을 하고 있으며 대중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유포시켜 자유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객관적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칼럼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대중적인 동의를 얻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동이다. 그런데 기존의 질서나 사고방식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주장은 불온하지 않게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소수자의 주장은 불온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만약 보수주의자들이 강 교수의 해석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불온한 사상 운운할 것이 아니라 다른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또 자신들의 논리가 다수 대중들에게 수용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아니면 불온한 사상을 탓하기 전에 왜 현실이 다수 대중들이 불온한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지를 고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국민들이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듦으로써 지켜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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