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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아름다운 여성활동가여
  •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
  • 승인 2005.11.0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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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찬바람을 몰고 이만큼 왔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자연의 변화를 저만치 앞서간 살얼음판인 것만 같아 옷깃을 여미는 손이 더 차갑기만 하다.

얼마 전 바람은 차도 햇살은 더없이 맑았던 가을의 한 가운데에서, 결혼식에 따라다니느라 바빴던 나는 계절을 즐기는 많은 이들을 보았다. 토요일, 야외에서 전통혼례로 올린 친구의 결혼식은 붉은 단풍이 있어 화려했고, 일요일, 식이 끝나고 들른 도봉산 초입에서의 동동주 한 잔은 가을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의 소란한 입담이 있어 흥겨웠다.

수 년 만에 만난 여성동지들

▲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
토요일, 결혼식 끝나고 어스름 저녁, 열 명이 넘는 ‘여자’들이 한 곳에 모였다. 지금 내가 일하는 단체의 전신인 ‘노동과건강연구회’를 만들고, 가꾸고, 거쳐 간 이들이 수 년 만에 모인 것이었는데, 모여 보니 여자들과 그 아이들로만 성원이 된 것이다.

“다들 새끼 까고 잘 살았구나.”

걸쭉하게 여는 말을 한 선배는, 인천에서 노동운동으로 청춘을 다 보내고, 쉰이 넘은 지금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복지운동을 하고 있는 분이다.

여전히 미혼이며, 여전히 ‘연애 좀 하라’는 구박을 듣는 그는, 예뻐지셨다는 후배들의 인사에 “(노동운동 떠나고) 한 꺼풀 벗었잖아”라며 껄껄걸 웃는다.

언제나 화통하고, 넉넉한 인품으로 운동판의 후배들을 보듬어주던 그 선배는, 젊은 날에 모아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나가는 가족이 뒤를 봐 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노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후배들은 걱정했었다. 나이든 여성활동가의 노후를 함께 우려하고, 방안을 찾아나서기에는, 우리 운동이 아직 혈기왕성한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선배는 더 여유로운 활동가로 후배들 앞에 나타났다. 한 명 한 명 눈길을 주고, 사소한 얘기도 들어주는 모습도 변함이 없고, 여전한 입담도 정겨웠다. 문제 많고, 갈등 많은 운동판에서 “야 요즘 인간관계 공부 호되게 했다”며 어려움을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곰삭은 활동가의 겸손이 묻어나와 오히려 즐거웠다.

또 한 선배, 역시 쉰을 넘긴지 한참 되었다. 황소를 앞세우고, 우리 쌀 살리기 전국 걷기대회를 하는데 나흘 전 충남 홍성에서부터 함께 하여 여기까지 걸어오는 길이라 하며, 선전물부터 나눠주신다. 역시 젊어지셨다는 후배들 인사에 “얼마 전 염색했잖아! 얼굴은 좀 되는데 머리가 하얗다는 아들 녀석 구박에” 변함없이 씩씩한 목소리. 한바탕 웃음이 쓸고 지나간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노동, 여성, 어디든 운동현장을 떠난 적이 없고, 현업 활동가가 아닌 적이 없는 선배의 활력에 기를 받았는지 덩달아 신이 났다.

모임의 말미에 선배는 이제는 애경사 많이들 치를 나이니까 잘 챙겨야 한다는 당부를 하면서, 연락처 주고받고, 간사 노릇할 후배까지 확인하는 것이다.

10년을 지금 일하는 곳에 있었지만 이 날 모임에서 나는 여전히 막내였다. 여기서 일하면서 나이 마흔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어 ‘다른 인생’을 사는 여자 선배들을 많이 보았다.
차돌멩이처럼 단단하고 야무지게 보이던 노조 선배는 마흔에 전라도로 내려가 고구마를 심고, 들기름을 짜더니만, 아이까지 안고 이날 모임에 나타났다.

“고구마 갖고 올라왔는데 다 팔았다, 참 급하게 오느라 들기름 못 싸왔는데 내려가면 바로 부칠게.”

아, 저마다 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꽃다운 봄날을 지나, 뙤약볕 한가운데, 때론 소낙비로 온몸을 적시며 치열하게 청춘을 보낸 그들은 마흔이 넘고, 쉰이 넘어 또 다른 모험에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저리도 풍성하게 열매 맺고 있잖아.

그래, 뿌린 것을 거두고, 더불어 나누려면 더 많이 기다려야 하는구나.
내 나이 서른다섯.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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