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근로 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청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뒤 마치 깡패의 소굴에서 벗어나듯 청계민주노조를 필두로, 수십년 깡패 어용노조, 가부장문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최초의 여성지도자가 이끄는 민주노조가 인천의 동일방직에서 시작되었다.

어용노조에서 민주노조로 한국모방(원풍)노조가, 노조결성이 금기시돼왔던 미국계 외자투자기업이었던 콘트롤데이타에서 외자기업 특례법의 굴레를 깨뜨리고 노조를 결성하였고, 반도상사, YH 등 박정희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긴급조치 시절 이렇게 여성노동자들은 분연히 노동자도 이 땅의 평등한 인간임을 선언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시작하였다. 

여성노동자들 70년대의 희망이었다

유령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꾼 한일도루코 여성노동자들, 어용노조 틈바구니에서 하루 12시간 지문이 닳도록 캔디를 포장해야 했지만 창고에 갇히고 매 맞으면서도 8시간 노동을 쟁취했던 해태제과의 당찬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금수강산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말인가”라며 값싼 노동력을 맘껏 착취하던 미국투자기업에 맞서 결혼퇴직을 물리치고 42시간 노동을 쟁취했던 콘트롤데이타 여성노동자들, 온갖 지혜와 단결력으로 민주노조의 선봉에 나섰던 원풍노조 여성노동자들, 그들이 있었기에 70년대는 사회의 희망이고 등불이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늘 용공분자, 불순세력, 사회불안요소자, 도산세력 등의 딱지가 붙어 거리로 쫓겨나고 블랙리스트로 어디에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 독재권력 하에서 20~30대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이 40~50대가 되어서 다시 일어났다. 권력이 진두지휘하며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던 우리들에게 빨갱이로 몰아세웠던 지난 독재권력의 횡포에서 20여년 만에 우리들의 지난 고통의 투쟁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여 일부나마 명예회복으로 인정되고 복직권고도 받았다.

이에 우리들은 지난 아픔을 딛고 못다 피운 민주노조운동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다시 일어섰다. 지난 3월24일 인천동일방직 앞에서 복직을 외친 중년의 나이가 된 아줌마투사들, 또 4월은 청주의 원풍모방 앞에서 복직투쟁을 시작한 아줌마투사들, 삼성동 동일방직 본사 앞에서 3박4일 거리노숙 투쟁들을 했지만 돌아온 회사측의 답변은 여전히 자기들의 책임은 없다고 항변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중단할 수는 없다.

총리실, 청와대 방문, 또 폭염과 장대비 속에서 중앙정부청사 앞에서 일주일 노숙투쟁 등 지난날의 저력을 다시 과시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우리의 투쟁

지난달 10일 우리는 국회헌정기념관에서 120여명이 모여 그 아픔의 상처를 다시 헤집어 보니 쫓겨난지 27년, 사회정의를 가슴으로 끌어안은 지 30여년 만에 가슴속 깊이 눌려왔던 지난날들이 전율처럼 온몸을 감으면서 저려오고 여기저기 눈물과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두환 정권의 쿠데타로 정보부, 합동수사본부, 보안사 등지로 끌려가 군복을 입혀서 폭력으로 강제사표를 쓰게해 쫓겨났던 일, 상급노조와 함께 민주노조 지도자들을 찍어 내어 정화조치 대상으로 직위박탈과 함께 쫓아냈다. 또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모진 폭력으로, 굶주림으로 탄압을 받아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상 생활을 할 수 없는 남성동지들의 두려움과 공포의 생활이야기, 빨갱이 며느리로 시집살이를 하고 쫓겨나야 했던 그 처절한 탄압의 사례들은 독재권력이 철저하게 준비한 국가권력의 탄압이 아니고 무엇인가?

민주화를 가로막기 위해 국가권력이 재벌을 비호하면서 총체적인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탄압했던 민주노조운동을 아직도 국가와 관련공무원들은 이익투쟁을 한 경제투쟁으로 취급하고 개별 기업의 책임으로 내던지고 있다.

국가 공권력이 개입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지금 정부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복직, 또는 그와 상응하는 직장을 보장하고, 모든 민주화운동가들에 취했던 평등한 민주화명예회복조치를 요구하며 그것이 해결될 때 까지 민주세력들과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끝으로 한국노총은 지난날 권력의 시녀로 노동운동 탄압에 나섰던 일들을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사과하고 역사 앞에 당당히 나설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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