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감이 깨기 전에 모두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새벽 2시는 넘겼을 한밤중에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는 너무 굵어 끊어지지 않는 철망을 ‘펜치’로 끊으면서 난생 처음 기도를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끊어내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기숙사를 탈출해 논에 빠지고 밭두렁에 넘어지면서 90명의 버스안내양들이 뛰어간다. 목적지는 인천 갈산동 대우기숙사(지금의 갈산동 대우아파트 자리) 건너편의 한 여인숙. 지금 선진여객이 있던 박촌에서 갈산역까지 버스로 20~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두 달을 준비했다. 

블랙리스트 노동자의 마지막 선택, 버스안내양

섬유노조 김영태 위원장이 동일방직 124명 해고자들을 ‘블랙리스트’로 작성했다고 할 때도 실감하지 못했다. 겪고 보니 ‘판결 없는 사형선고’였다. 먹고살아야 하는데 가는 곳마다 2~3개월이면 쫓겨났다. 계속된 해고에 집도 없다. 돈도 없다.

마지막 선택이라 생각하고 버스안내양을 하기로 했다. “동생이름으로 이력서를 써갖고 가면서도 자신이 없어. 아~! 면접에서 떨어졌으면…, 안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어.”

그러나 실제는 김용자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새벽 5시에서 밤 12시까지 일한다. 4~5일 일하고 하루 쉬는데 사람이 없을 때는 일주일 연속해서 일하기도 한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데 기숙사 뒤로는 철조망이 막혀있고 앞으로는 사무실을 통과해야 한다. 이른바 ‘삥땅’을 막으려고 기숙사에 가둬놓는 것이다. 허용된 외출은 일주일에 한 번 목욕시간.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이른바 ‘센타(몸수색)’였다. 밤 12시 작업이 끝나면 사감실에 들어가서 팬티까지 벗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해야 하는데 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미 버스회사에서도 두 번이나 잘린 김용자 이번에는 ‘작정’하고 들어갔다. 

‘김상무님 물러가세요’

여인숙에 도착한 이들은 버스가 다닐 즈음 창문에 붙일 요구사항을 커다란 종이에 매직펜으로 적기 시작했다. 첫째는 ‘김○○ 상무이사 물러나라’. 김상무는 악덕관리자인데다 안내양들한테 상습적인 성폭행과 폭력을 일삼았다. 두 번째는 직접 몸수색을 하는 ‘사감 물러나라’, 셋째 ‘센타(몸수색) 중지하라’ 등 핵심 요구부터 기숙사 수도꼭지 증설 같은 근로조건 개선까지. 그런데 어린 안내양이 종이에 쓴 요구사항은 “김상무님 물러가세요”였다. 어떻게 나이든 상무한테 반말을 쓰냐는 거였다. 새벽에 시작된 이들의 농성은 저녁 5시께 경찰의 진압으로 끝났고 90명 전원이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곳에서 김용자만을 빼고 모두 석방됐다. 아마 경찰이 보기에도 안내양들이 너무 심각한 인권유린 상태였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데 석방된 안내양들은 기숙사로 돌아가서 ‘김용자를 석방하라’며 작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계속했다. 결국 경찰은 김용자를 석방했고 선진여객측은 ‘김○○ 상무이사 물러나라’는 것만 빼고 요구조건을 다 들어줬다고 한다. 김용자는 곧바로 수배자가 됐지만 안내양들은 그를 빼돌렸다. 안내양들은 그 후 1주일에 한번 목욕시간에 김용자를 찾아와 먹을 것도 챙겨주고 생활비도 보태고는 머리에 물을 잔뜩 묻히고 돌아갔다. 너무나 처절했던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앞장섰던 ‘동지’에 대해 그렇게 의리를 지켰다. 

일시에 정리된 소모품, 버스안내양

여공, 식모, 버스안내양 70년대 가난한 딸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의 전부였다. 인권유린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중 버스안내양은 겨울에 사람 많을 때는 문짝에 매달려가다 떨어지기도 하고, ‘오라이~’하며 버스를 때리던 손에서는 겨울이면 피가 철철 흘렀다. ‘타이밍’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잠은 쏟아지고, 너무 힘들어 반쯤 열린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하고픈 충동을 한두 번 느낀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버스안내양들은 줄줄이 딸린 오빠와 남동생 학비를 댔다. 80년대 중반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버스안내양들은 일제히 사라졌다. 수만명의 안내양들이 정부정책에 의해 일시에 ‘정리’된 소모품이었던 것이다. 

김용자 동일방직 해고자의 구술의 일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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