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가 또 '껀수'를 '언론'에 '제공했다'라고 하면 틀린 말일까. '취업비리'로 시작된 2005년. '각목 사태', '권오만'에 이어 '강승규'까지. 노동계는 정말 죽을 맛이다. 잘못은 인정하고 도려내면 된다. 그것은 당사자의 몫이다. 그러나 언론은 하나의 잘못을 그 하나로 놓아두지 않는다. 뒷골목의 법칙은 항상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것'이기에.

언론은 왜, 어떻게 노동을 박해하는가. 그렇다면 노동은 언론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매일노동뉴스>가 여덟차례에 걸쳐 기획을 준비했다. 이 연재는 일주일에 한차례씩 게재된다. <편집자 주>




해마다 6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파업 망국론’. 그 불길은 꺼질 줄도 모르고 활활 타오른다. ‘집단이기주의’에서 ‘불법파업’까지…. 화장실과 밥 먹을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해도, 불법파견을 근절해 달라고 해도, 생존권의 위기 앞에 저항하다 집단해고 되거나 무더기 손배·가압류가 떨어져도 관심이 없는 언론. 그러다 파업 때만 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노동자는 경제를 망치는 주범이고, 대기업노조의 간부들은 부패한 ‘귀족’으로 묘사된다.

우리 언론은 현재 노동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 취업비리나 공익사업장 파업 같은 소식이 있을 때가 있다면 모를까, 노동은 사회면 한 귀퉁이에 자리 얻기도 힘든 실정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의 유명한 '헤게모니론'에서, 헤게모니란 한 사회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확산하고 대중화 함으로써 동의를 획득하고 이를 통해 전체 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도력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여서, 뉴스는 매체의 생산물로서 결코 그 매체 자신의 물적·제도적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때 '독립언론'이란 슬로건이 언론운동의 대안으로 대두되기도 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독립이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대개의 경우 자본권력, 족벌언론권력에서 독립을 말하지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독립일 뿐 아니라 설령 독립한다고 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론이 신이 아닌 다음에야.

영국 출신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존 다우닝은 그의 저서에서 매체 '일반'이 노동문제에 대해 매우 편파적인 보도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중매체가 쟁의보도에서 쟁의 원인에 대한 언급 없이 효과에만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폄하한다"는 것이다.

존 다우닝(John Downing)은?
1940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과 런던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뉴욕 헌터대학, 텍사스대학을 거쳐 현재 사우스일리노이대학 교수로 있다.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경제학 등에 걸쳐 광범위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Media Machine」(1980), 「Film and Politics in the Third World」(편역서, 1987) 등이 있고, 「변혁과 민중언론」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번역서가 나와 있다.


그는 ‘언론기계’(Media machine)이란 저서에서 매체 일반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매우 편파적인 보도를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변혁과 민중언론’에서는 민중의 사회변혁운동과 생존권투쟁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운동의 정당성 교육과 선전, 이데올로기적 방어 등을 수행할 도구로서 ‘매체’라고 밝히고 있다. 다우닝은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해 이러한 임무에 복무할 ‘민중매체’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각국의 사례를 통해 검토하고 있다.

또 스우보다 프랭크는 1989년 ‘미국에서의 노동관계보도의 변천과정’이라는 글에서 1단계인 1930~1950년대에는 노사관계를 폭력으로 묘사하려는 듯 거리에서의 분규 사태에 보도를 한정했으며, 2단계인 1970년대까지는 교섭테이블로 옮겨가 거의 모든 주요 신문들이 노동문제의 취재 및 보도를 위한 상당수의 인원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3단계인 1970년 중반 이후는 노동문제는 크고 복잡한 경제문제의 일부분으로 다뤄졌고, 취재진도 현격히 축소되었다고 밝혔다.

제2의 권력 ‘언론’…자본과 공고한 유착

언론이 노동에 적대적인 이유는 지배계급인 자본 운운 하지 않더라도, 광고주인 재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상황을 빼놓을 수 없다. 군사독재의 몰락과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우리나라의 언론은 독재권력의 시녀에서 이제 제1의 권력인 자본의 시녀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거의 대부분의 언론종사자들은 “70~80년대 구독료가 총 매출액의 40% 정도를 차지할 때는 광고를 넣기 위해 그나마 ‘기사를 빼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경영의 어려움 앞에 직면한 현재 언론사는 ‘광고’의 압력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중앙방송의 매출액 구성(단위 : 백만원, %)
구분과목2002년2003년
금액구성비율금액구성비율
KBS수신료수익 481,96937.3499,69240.5
광고방송수익735,16356.8678,15454.9
협찬수익46,1025.9 31,1472.5
기타방송수익30,021 25,2182.0
1,293,255100.01,234,211100.0
MBC광고수익706,33797.1673,66997.6
SBS광고수익621,79597.7592,57697.1
* 출처 : 2004 언론 경영실태 분석

2002년, 2003년 MBC와 SBS의 수익의 97%가 광고수익이다. 광고 없이 방송사의 존립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주 광고주들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해 TV, 신문, 라디오, 잡지 등 4대 매체 광고비는 6조691억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2003년 6조6천112억원에 견줘 8.2% 줄어든 액수였다. 매체별로는 TV가 2003년 2조3천553억원에서 지난해 2조2천235억원으로 5.6%, 라디오는 2천274억원에서 2천186억원으로 3.8% 각각 감소했다. 신문은 3조7천266억원에서 3조3천541억원으로 10.0% 떨어져 4대 매체 중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잡지는 3천19억원에서 2천729억원으로 9.6% 감소해 그 뒤를 이었다.

광고주별로는 삼성전자가 1천952억원으로 가장 많은 광고비를 지출했다. 뒤를 이어 SK텔레콤(1천307억원), LG전자(1천46억원), KT(1천45억원), 케이티프리텔(844억원) 등의 순이었다. 업종별로는 컴퓨터 및 정보통신이 8천519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서비스(7천5억원), 건설·건재·부동산(5천363억원), 금융·보험·증권(4천795억원) 순이었다.

신문 광고는 건설, 대형유통사, 정보통신 등 몇개 산업 분야가 주도하고 있다. 이는 대형광고주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국민여론이 몇개 산업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위험성은 항상 상존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취업선호도도 신문의 광고 노출빈도대로 매겨지는 게 의아하지 않은 이유이다.

군사독재 정치권력의 ‘보도지침’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제 제1의 권력인 ‘자본’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제4부라는 '사회의 목탁' 언론은 자본 앞에만 서면 한없이 약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언론의 보도가 노동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언론은 아직도 비판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 매체감시기구인 ‘미디어워치글로벌’과 그 프랑스 지부인 ‘OFM’ 창립을 주도한 르몽드 디플로마틱의 이냐시오 라모네는 <커뮤니케이션의 횡포>라는 저서에서 언론권력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라모네는 “오늘날 제1의 권력은 명백히 경제가 행사하고 있고, 제2의 권력은 분명히 미디어적인 것으로서, 미디어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영향력과 행동 및 결정의 도구”라고 간파했다.

“삼성은 누가 견제할 수 있을까. 언론? 삼성가족은 이미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고, 방송으로의 재진출을 꾀하고 있다. 언젠가 결국 삼성의 방송이 출현할 것이다. 그땐 삼성 미디어 왕국이 된다. 좌파 성향 신문의 광고 수입 중 삼성이 준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한다. 삼성이 광고를 주지 않으면 작은 신문들은 곧장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핵심을 잘 잡은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사람은 조선일보의 양상훈 정치부장이다. 내용을 좀더 보자.

“대통령? 임기 5년의 대통령과 무제한 임기의 삼성 회장 중 누가 더 진정한 파워맨일지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렇게 한 기업이 국가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경우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삼성이 너무 크기도 하고, 우리 사회가 너무 얇기도 한 탓일 것이다. 정말 막가는 운동권 학생 정도나 삼성에 한번 덤벼볼 수 있는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삼성의 독주, 자본에 종속된 언론

조선마저 우려해야 하는 삼성의 독주. 삼성전자는 올해에만 , <동아일보>, <한겨레> 등 5명의 기자를 영입해 홍보라인에 투입했다. 중앙일보는 5월25일 대한민국 ‘파워조직’ 1위는 삼성이란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스스로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낸 기사였다. 동아시아연구소와 공동으로 진행한 전화설문조사에서 삼성 등 대기업은 최상위권을 차지했고, 정당과 양대노총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X파일' 사건 최초 취재로 유명한 MBC의 이상호 기자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2005년 한국 ‘독재’의 부활’이란 글에서 이 기사를 “마치 쿠데타군이 내놓은 포고문 1호를 연상시킨다”며 “순금으로 테를 엮고 수표다발로 촘촘히 짠 파리채로 언론사마다 기자 사냥을 벌인다”며 삼성에 비판을 가했다. 이 기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삼성과 중앙일보를 “국가 검찰권을 금권으로 장악해 세차례의 대선 비자금 수사의 포화를 유유히 뚫고 진격해 온 삼성”과 “자본독재의 육군사관학교이자 국정홍보처인 <중앙일보>”라고 철저하게 고발했다.

이 기자는 이와 함께 “엊그제까지 공영방송의 앵커였던 보도국 간부를 하루아침에 삼성의 대변인으로 옮겨다 놓았다”면서 “MBC의 기자사회는 자본의 태풍에 간판이 날아갔는데도 놀랍도록 침착하다. 기자정신의 위기를 아무도 입밖에 내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삼성은 이미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사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다. 너무 큰 광고주이기도 하다. ‘삼성공화국’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지난 고려대 사건은 재벌이 최고권력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강연하러 온 전직 대통령 김영삼은 정문에서 막혔지만 큰 문제가 아니었다. 현직 대통령 역시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삼성 회장 이건희는 다르다. 학생들이 소란(?)을 떨었다고 온 보직교수들이 사퇴를 운운했다.

“名博 수여식 파행 부끄럽지 않은가”(세계, 5.6) “과격시위로 학교명예 실추…폭력없는 100주년 행사로”(동아, 5.5) “이건희 회장 막은 학생들에게”(매경, 5.4) “고대 극소수 학생의 ‘안타까운 脫線’”(동아, 5.4) “李회장을 그렇게 대우하다니…”(서울경제, 5.3) “유감스러운 고려대의 명예학위 저지 소동”(경향, 5.3) “상아탑의 위험한 ‘反 지성 反 영웅주의’”(헤럴드경제. 5.3)

‘반지성’ ‘시대착오적 이념의 노예’ ‘망동’이란 표현이 난무했고, 정작 학생들이 지적했던 ‘삼성의 무노조와 노동자 탄압’에 주목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이같은 언론보도에 대해 언론노조는 ‘삼성에 엎드린 보도에 깊이 사과드립니다’는 논평을 냈다. 언론노조는 “‘저지 소동’, ‘봉변’, ‘파행’ 등의 단발성 기사만 내보낸 이번 사태는 조선, 중앙, 동아만의 논조에서 나타난 문제가 아닌 전체 신문사에 ‘자본’이 미치는 영향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며 “실제 ‘삼성의 광고 없이는 신문사가 운영될 수 있겠는냐’라는 너무나 아픈 치부까지 드러내고 말았다”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또 “그동안 우리는 사주로부터 편집권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 왔다”면서 “하지만 자본으로부터 편집권 독립이라는 숙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밝혔다.

편집권의 독립이란?
편집권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언론의 존재근거이자 공익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편집권의 독립성이란 편집자가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갖고 있는 경우이다.


1. 경영진이 제공하는 자료나 편집서비스를 거부할 권리
2. 재정적인 요소를 합리적으로 고려하고 기존의 신문발행 정책의 범위에서 신문의 내용을 결정할 권리
3. 예산 범위 내에서 비용을 지출할 권리
4. 탐사저널리즘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
5. 편집정책에 대해 사주나 경영자의 충고를 거부할 권리
6. 신문기업, 신문기업의 계열사나 모기업을 비판할 권리
7. 기존의 신문정책의 한도 내에서 특별한 주제에 대해 시각을 조정하고 의견을 바꿀 권리
8. 기존 신문정책의 틀에서 기자를 고용하거나 해고할 권리
9. 기존의 신문정책의 틀에서 고용 조건을 결정할 권리
10. 기자에게 취재업무를 배당할 권리
                                                                                                                   <출처=영국왕립신문조사위원회>

그러나 언론계 은어로 삼성을 ‘빨아주는’ 신문기사들은 이후 더 눈물겨울 정도였다. “삼성, 경계론 차단 ‘고심’”(SBS, 6.1) “1%의 비판도 겸허하게 수용하자”(이데일리, 6.1) “삼성독주 나눔경영으로 포옹”(서울, 6.2) “앞만 보고 달린 삼성, 돌아볼 때 됐다”(중앙, 6.3) “‘고독한’ 삼성을 위하여”(서울, 6.4)

삼성 사장단이 두 차례 회동해 이건희 회장의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를 둘러싼 고대 사건 이후 불고 있는 일각(?)의 ‘삼성독주론’에 대한 대책회의를 소개하는 기사들이었다. 경제지들은 이를 경제면 톱기사로 배치했다. 이건희 옹호 글들을 보자. “삼성 좋은 기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인지, “삼성 ‘존경받는 기업이 되자’”(매경 6.2) “단 1% 반대세력도 껴안고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겠다”(서울경제 6.2) “안티삼성의 요구조건 명확치 않아”(머니투데이 6.2)

“삼성이 얼마나 세기에…” “초현실적 권위” 라는 컬럼과 ‘이건희 회장 항의시위자에 고려대의 반지성적 징계 방침’이란 비판적 기사를 내보냈던 한겨레. 그러나 한겨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태기 한겨레 사장은 고대 사건 이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무조건 삼성은 악이라고 보는 시각은 맞지 않는다. 특히 삼성에 노조가 없다는 이유로 고대 학생들이 이건희 회장의 학위 수여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서적으로 맞지 않으면 삼성에 안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럼 삼성(존재)을 부정하겠느냐”고 말했다.

또 안경환 서울대 교수의 한겨레 기고는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5월24일자 ‘학생운동과 선생의 역할’이란 칼럼에서 안 교수는 “아무리 좋은 제안도 폭력 점거와 같은 극한투쟁이 따르면 설득력이 약해진다”며 시위 참여 학생들을 비판했다. 또 “학생의 물리력 행사를 품어 감싸기에 앞서 강한 질책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라며 학생징계 반대성명을 낸 민교협도 비판했다. 이어 안 교수는, 학생들이 비판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에 대해 “삼성의 기업경영방식에 철학적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없이도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한 후에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경영방식도 있을 것”이라며 “불법이 있었다면 합당한 응징을 법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그는 고려대가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대학과 자본의 유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민교협의 지적에 대해 '돈은 쓰는 순간 아름다워진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반박하기도 했다.

노조 등 내부의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독립언론이라는 한겨레조차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기자 스스로 ‘출입처’ ‘광고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배이데올로기가 국가에서 자본으로 넘어온 단계. 이제 자본에 포섭된 언론은 스스로 노동운동과 파업에 대해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삼성 등 자본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떠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문의 위기’는 바로 자본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위기와 다를 바 없다.

지난 2003년 현대차노조에 대해 ‘고졸 연봉이 6천’이라며 대기업노조 이기주의를 선동했던 언론들. 정작 임금인상 투쟁을 반대하는 언론사의 임금은 어느 정도일까.

일단 국내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조중동을 살펴보자. 전국언론노조가 2003년에 분석한 바에 따르면 <조선일보>의 1인당 인건비는 9천600여만원이고,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7천300여만원, 6천100여만원이었다. 이에 반해 현대자동차는 올해 임금 타결 이전까지 1인당 평균 3천900여만원을 받아오다가 사측 주장에 따르더라도 이번 인상으로 1천여만원이 오르게 됐다.

하지만 이 가운데 평일, 휴일, 심야 연장근무를 뺀 통상급의 비율이 고작 60%를 밑돌고 있고, 여기에 현대자동차 생산직의 평균 부양가족수가 3.9명인 점을 감안한다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에 부양 가족수조차 단출한(동아일보의 평균 부양 가족수는 1.62명) 거대 신문사들이 임금투쟁 때마다 ‘딴죽’을 거는 게 과연 상식적인 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엘리트의식으로 뭉친 데다 고연봉 떡고물까지 쥐게 된 기자들은 더이상 소외된 소수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 이용할 일이 없는 기자들이 그걸 기사로 다루겠어요? 기자들 이미 맛이 갔어요.” 한 언론노조 관계자가 하는 말이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일면으로 이를 분석하긴 어렵지만, 최근 입사하는 기자들 가운데 소위 ‘강남 8학군’ 출신들이 점증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론노조는 “언론계 내부에서 ‘3대 언론보도 강령’이라며 회자되는 ‘침소봉대’ ‘아전인수’ ‘부화뇌동’이라는 냉소가 노조의 주장에는 항상 반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볼 때다”라고 밝히고 있다. “노동보도준칙 그게 뭔데?” 취재를 통해 만난 기자들은 의아해 했다. 신문사의 윤리준칙과 강령은 한보 사건이나 대구 페놀 등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 여론무마용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노동보도 준칙도 마찬가지다. 2003년 화물연대, 공무원노조의 파업과 관련 노조와 노동문제에 적대적인 언론보도와 관련 최소한의 내부규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들끓었다.

KBS에서는 그해말 ‘노동사회 갈등 보도준칙’을 제정했다. 하지만 그때뿐. 최근의 노동보도에서 보듯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파업하면 무조건 ‘대란’이니 ‘막대한 피해’니 하고 보도해야 하는 고정관념의 문제. 군사독재정권 시절 확립된 파업보도의 틀이 너무나 견고해 보도국 편집책임자나 기자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사측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언론 관계자들에 따르면 노동보도 준칙은 조선일보나 KBS가 오히려 제일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웬만한 사안은 내부 데스킹이나 암묵적 합의에 기초해 쓰고 있다.” 한겨레노조조차 ‘노동보도 준칙’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할 정도다. 여태껏 노동보도 준칙이 없어서 문제된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KBS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동보도 준칙이 있으면 그나마 불공정 보도에 대해 근거를 갖고 문제제기를 해 내부취재시스템 개선 노력을 기울일 여지라도 있지만 준칙이 없는 다른 언론사는 심각한 상태”라고 말했다.

언론사들의 병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입처 제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정부 각 부처, 국회, 청와대, 경제단체 등 부처별로 취재기자를 상주시키고 있는 것. “노동부 출입기자는 있어도 노동전문기자는 없다.” 노동 분야의 전문성이 워낙 떨어지다 보니 생기는 말이다. 언론사에서 노동 분야는 그야말로 ‘찬밥’ 신세다. 경제부, 사회부 기자들이 사안에 따라 노동관련 취재가 이뤄지고 있는 것. 출입처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는 기자들의 기사가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기자들은 출입처를 가져야 비로소 ‘기자다운 의식(?)’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겨레는 노동 분야에 경력기자를 포진시키고 있지만 ‘장래 희망 분야’를 묻는 사내조사에서 ‘노동’을 전담하겠다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겨레의 한 기자는 “노동 분야가 중요도 영역에서 밀려나고 있고, 경제의 부속물로서, 파업할 때나 노조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광고주, 즉 자본의 강력한 영향력과 족벌사주의 무소불위의 힘 앞에 고연봉 기자들은 스스로 알아서 긴다. 생존의 위기 앞에서 독립언론 등 군소신문사는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회사가 문 닫을 판인데 파업은 웬 파업. 기자들은 온순한 양이 되었다. 이들 기자들에게서 ‘노동친화적’ 보도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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