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십년 전인 1996년 초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 코사투) 중앙집행위원회는 ‘노동조합의 미래에 관한 셉템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에 남아프리카의 변화된 정치·경제 상황을 조사하고, 코사투의 정책과 전략이 새로운 상황에 적절한지를 평가하도록 위임했다.

노조간부와 학자, 정치인 등이 폭넓게 참여한 셉템버위원회는 1여년의 활동을 거쳐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셉템버보고서'다. 셉템버위원회나 셉템버보고서의 셉템버(September)는 사람 이름으로 당시 코사투 수석부위원장인 코니 셉템버의 이름에서 따왔다. 한국에서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1998년 말 우리말로 번역해 책으로 내놓았는데, 필자도 번역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셉템버보고서'의 한국어판 출간을 전후하여 노동계에서는 ‘사회적 조합주의’(social unionims)와 ‘정치적 조합주의’(political unionism)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실 그 논쟁의 이면에는 노동조합의 이념으로서 사회주의의 채택 여부와 노동조합의 전략으로서의 개입과 참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이후 노동조합의 사회적 대화에 대한 전략, 노사정위원회 참가에 관한 논쟁과도 연결되지만, 수준 있고 깊이 있는 논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셉템버보고서'가 번역되기 전에 한국의 어느 학자는 “남아공의 코사투가 변혁적인 노동운동을 지향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보고서를 인용하기도 했는데, 책이 번역된 이후에는 보고서가 남아공의 변혁적인 노동운동과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지그재그 조합주의 - 서비스·기능·규율의 부족

'셉템버보고서'는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다루는 주제가 상당히 폭넓다. 노동운동의 미래에 관한 시나리오, 노동조합운동의 유형으로서 사회적 조합주의, 정치동맹, 사회경제적 재분배 전략, 공공부문의 개혁, 작업장 민주주의, 비정규직과 비공식부문 조직화, 노동운동의 자기 개혁과 노조 혁신, 코사투 조직 변경 등이 그것이다.

번역작업에 참여하면서 논쟁이 되었던 사회적 조합주의 이상으로 필자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제9장으로 조직개발(organizational development)에 관한 내용이었다. “우리는 사회 변화, 정부 변화, 작업장 변화에 대해서는 늘 말하지만, 우리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이 장은 능력있고 민주적이며 역동적인 노동조합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은 노동조합들이 공유해 온 비전과 이데올로기를 약화시켰다. 민주주의의 성립으로 노동조합들은 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광범위한 쟁점에 개입하게 되었다. 투쟁 조건이 변화했다. 80년대 노동조합은 대중의 전투성과 아래로부터의 창조성에 이끌린 반면, 지금은 정부, 사용자들과 전국 차원의 협상으로 중심이 이동했다. 코사투와 가맹조직들은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간부와 지도부를 정부와 사용자에게 빼앗겼다. 노동조합이 매우 커다란 조직으로 성장함에 따라 민주주의, 효율성, 창조성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흑인 중간계급의 급속한 성장과 이에 따른 자기만족 문화는 노동조합의 전통적 문화인 연대를 잠식하고 있다. 서비스 부족, 기능 부족, 규율 부족, 헌신성 부족과 같은 우려할 만한 조직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

셉템버위원회가 활동할 즈음은 코사투가 만들어진 지 십년을 넘어서던 때였다. 십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노동운동 내부의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게 '셉템버보고서'의 핵심 메시지였다.

제9장은 이러한 경고로 이어진다. “변화된 조건 때문에 코사투와 가맹조직은 전략적 능력과 비전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코사투와 가맹조직은 스스로 주도하기보다는 다른 세력들(사용자와 정부)이 주도권을 행사하면 임기응변으로 이에 대응하면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임기응변, 수동적 태도, 무능함에 기초한 노동조합운동을 지그재그 조합주의라 부를 수 있다.”

'셉템버보고서'의 핵심, “조직혁신 프로그램”

제2장은 다음과 같이 ‘지그재그 조합주의’를 정의한다. “노동조합은 이 문제 저 문제를 오가며 지그재그 한다. 노동조합은 비효율적이고, 유능한 현장위원과 간부들을 잃게 된다. 노동조합은 전략적 능력이 없고, 더 이상 진취적이지 못하다. 노동조합의 정책들은 서로 모순되고 임시방편으로 흐른다. 노동조합의 연대 문화는 자기만족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잠식당한다. 노동조합운동은 사회 변화를 위한 적극적 주체라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와 갈등의 희생물이 된다.”

보고서는 노동조합이 직면한 조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단편적이고 임시방편적인 대응을 뜻하는 “지그재그 조합주의”가 그 하나이고, “기술관료적 변화”가 두번째이며, “조직혁신 프로그램”의 실행이 세번째 방안이다.

지그재그 조합주의는 “문제는 알지만 뾰족한 수가 없지 않느냐”는 주먹구구식 대응이다. 기술관료적 변화는 “노동조합을 전문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경제학자, 변호사, 경영자, 연구자들 같은 사회에서 높은 수준의 봉급을 받는 전문가들을 고용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강조점은 “효율성”에 맞춰지는데, 이 경우 현장출신 지도자들을 소외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으며, 민주주의를 증진하거나 노동자들의 역량을 강화하지 못하는 효율성이라는 자본가들의 개념을 선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의 조직인 노동조합의 조직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셉템버보고서'가 제안하는 방안은 조직혁신 프로그램이다. 그 목표는 노동조합을 능력있고, 민주적이며, 혁신적인 조직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이를 위한 권고사항으로 △조직혁신 과정을 지도하기 위한 지도부의 헌신성 △각급 노조의 조직혁신 과정을 추동하기 위한 조직혁신팀의 구성 △지도부와 조직혁신팀이 마련한 내용에 대한 각급 단위의 대중적 토론 △산별조직의 노동자 참여와 통제 구조 평가 및 구조 개혁 △노조의 조직 관리/경영 실태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 마련 △노동운동의 조직개발(OD) 역량 강화, △노조가 채용한 전문직들의 기능, 창조력, 업무수행 능력, 직무만족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효율적인 조직 운영 체계와 절차의 개발 및 운영 △“모든 현장위원은 교육받은 현장위원”이라는 슬로건 아래 현장위원 교육캠페인 전개 등을 보고서는 제시하고 있다.

대안이 없다고? 해답은 있다!

'셉템버보고서'가 제안하는 ‘사회적 조합주의’는 여러가지 내용을 갖고 있지만, 노동조합 조직 과제와 연결시켜 본다면, 조직혁신 프로그램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고서는 (노조가 채용한 전문직으로서의) “직원의 사기와 근로조건”에 관한 절을 따로 두고 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위원회는 노조 채용직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20%가 자신의 일에 불만을 갖고 있고, 40%는 보통이라고 답했다. 60%가 자기 일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낮은 봉급과 수당, 훈련과 경력관리의 부족, 자신의 활동에 대한 인식 부족이었으며, 이러한 불만은 높은 이직률로 나타난다”고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응답자의 20%만 70년대와 80년대에 노동조합에서 일했고, 56%는 노조에서 일한 지 4년이 되지 않았다! 높은 이직률은 계속될 것이다. 응답자의 28%는 앞으로 1~2년 동안만 노동조합에서 일할 것으로 예상되며, 37%는 2~5년 안에 노조를 떠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조합 활동을 중장기적인 경력과 헌신의 장으로 보는 노조운동가는 상대적으로 적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고서는 노동조합이 “△채용직원의 관리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 △인적자원개발 전략을 개발하여 채용직원의 교육과 기능 향상에 앞장설 것 △새로운 업무수행 방법을 개발할 것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것 △채용직원 풀(pool)로서의 지식인과의 연대를 강화할 것 △채용직의 이직률을 조절할 방법을 찾을 것 △채용직원 대표 또는 채용직원을 위한 조직을 고려할 것” 등을 권고하고 있다.

십년전에 만들어진 '셉템버보고서'를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이 번역되고 난 지난 7년 동안 노동조합운동은 변화된 상황에 맞게 조직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해 왔나 생각하게 된다.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사업자 대표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감옥에 가고, 한국노총 화학노련에서 활동하던 (노동조합이 채용한) 전문직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태는 어쩌면 사회의 변화에 둔감하고 자기 개혁에 관심 없는 노동조합운동의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하지만, 위기를 극복할 해답은 없는 게 아닐 것이다. 문제는 노동조합운동이 한물간 이념 논쟁과 내용 없는 정파 경쟁에 매몰되다 보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사업에 관심을 잃어가는 풍토가 아닐까. '셉템버보고서'를 다시 읽으며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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