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47, 96, 86, 91, 81, 46, 55, 45…’ 이 숫자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슨 암호일까 궁금해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한 레미콘 차량 운수노동자가 1월부터 9월까지 일한 성적표다. 그들은 이것을 ‘탕 뛰기’라 말한다. 한번 운행하면 거리에 관계없이 1탕이다. 운송비는 회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3만원 전후이다.

100탕이면 대략 300만원을 손에 쥔다. “많이 받네.” 오해는 금물이다. 기름값과 차량수리비, 보험료, 식대 등을 제하면 임금의 절반은 날라 간다. 의료, 고용 등 4대보험도 없기 때문에 실제 월급은 100만원 대에 머물 뿐이다. 한달에 100탕은 해야 입에 풀칠하며 그럭저럭 먹고 살 수가 있다.

그런데 봄 성수기에도 실적은 80~90탕에 머문다. 이마져도 회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좋은 실적이 그렇다는 얘기다. 40~50탕에 머무는 여름과 겨울 비수기엔 죽을 맛이다.

신흥레미콘의 경우 9월 급여는 100~150만원 수준이다. 기름값, 차량수리비 등을 제하면 최저임금 수준이다. “사장님 오셨어요.” 식당에서나 부품수리공장에서 받는 호칭이 달가울 리 없다. 말이 좋아 ‘개인사업자’지, 그들은 엄연히 회사의 지휘 통제를 받고 있는 노동자다. 그것도 ‘특수고용’이라 불리는 비정규직 노동자.


“일 하면서도 빚은 늘고 엄청 열 받죠”

레미콘 운수노동자들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경기도 파주의 신흥레미콘을 찾았다. 레미콘노조의 시한부 경고파업을 이틀 앞둔 지난 10월19일 오전. 대형 레미콘 탱크와 차량 수십대가 공장안에 가득 차 있다. 들고 나는 레미콘 차량들로 북적거려야 할 성수기이지만 입구에서부터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흥레미콘은 4조로 나눠 ‘순번제’로 일을 나가고 있다.

정오가 다 되어서야 2조에 편성된 분회의 조직부장 노충기(36)씨가 레미콘 운전대를 잡는다. 운행일지를 적고, 무전을 쳐서 회사 위치를 재차 파악한다. 금방 도착이다. 요즘 일거리들은 대부분 왕복 1시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다.

물류창고 앞에 도착한 차량은 시멘트를 쏟아 붓기 위해 후진을 한다. ‘우지끈’. 순간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행히 지게차의 나무 받침판이다. 자칫 타이어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한 짝을 바꾸는데 20만원이다. 펑크라도 나면 몇 만원의 생돈이 그냥 날라 간다. 비탈에 급회전 길, 울퉁불퉁한 공사현장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조심 또 조심하지만 평지인데다 옆 좌석에 동행한 기자가 자꾸 말을 시키니 순간 방심했나 보다.

“일 하면서도 빚 늘어 가는 게 엄청 열 받는 일이죠. 혼자 벌어서는 애들 키울 길이 없으니 대부분 맞벌이에요.” 회사로 돌아와 레미콘 차량 내·외부를 깨끗이 닦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비조합원의 아내가 운영한다는 구내식당은 건설현장 함바집처럼 허름한 가건물에 한 끼 2,500원짜리였다. 감자볶음, 김치, 나물 등 반찬은 달랑 3가지다. 멀건 쇠고깃국은 배고픈 위를 달래주기엔 역부족처럼 느껴졌다. “원래 식당 찬이 이래요. 화장실도 하도 조합에서 지어달라고 하니까 재작년에 조립식으로 하나 만들었죠.” 목욕, 샤워 시설도 없고 대기실의 에어컨도 조합비를 걷어서 샀던 것. 겨울에는 대기실 난방도 잘 안되거니와 누울 자리도 없어 차량 운전석 뒤편 간이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3조 첫차가 출발한다. “지금 성수기인데 40~50탕하기도 힘들어요.” 10년차인 김정모(42)씨. 경찰공무원으로 일하다 전업한 그는 레미콘을 하면 돈을 벌 줄 알았다. 90년 초 만해도 200만호 건설, 일산신도시 건설 등 경기는 좋았다. 그러나 IMF 이후 건설경기는 죽고,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각 회사들은 덤핑을 치게 됐다. “정상가격의 70% 수준까지 내려가고 있어요. 회사가 이윤을 챙기려면 결국 노동자들 운송비와 기름값을 깎는 거죠.”

그는 현재 출고 2년 된 거의 새 차를 몰고 있다. 7천~8천만원에 이르는 차량 할부금만 한달에 100만원이 넘게 들어간다. 그런데 벌이는 갈수록 태산이다. 최근 파주 LG필립스LCD 공장 건설로 잠깐 물량이 느는 듯했으나 올 2월 이후로 이마저 일거리도 뚝 끊겼다.

“생활이 안돼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해요.” 저녁까지 기다려 한 탕은 더해야 하지 않겠냐는 김 조합원. 벙어리 냉가슴 앓듯 레미콘노동자들은 서로 서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주변에 이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기실에 붙어 있는 신용회복 상담 안내 전단지는 이들의 처지를 말없이 보여주는 듯 했다.


울며겨자먹기로 떠안은 차량…벼랑 끝 삶

회색 시멘트로 질퍽이는 공장 마당. 대기실에서 낮잠을 청하는 노동자, 빗물 새는 낡은 차량 지붕에 실리콘을 바르고 있는 노동자, 삼삼오오 한담을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노동자들. 그들의 대기시간은 길고도 지루했다.

“극단적으로 가든지,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보통상황이 아니에요.” “지금 단가로는 먹고 살길이 없어요.” “하루 종일 한두 탕 밖에 뛰질 못하니 죽을 맛이죠.” “레미콘 차량은 팔아도 똥값이고, 다른 화물로 대체할 수도 없고 난감합니다.” “노가다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종일 대기하잖아요.”

불만은 쏟아졌다. 그래도 한번 운행에 3만3천원, 다른 회사보다는 나은 편이다. 신흥레미콘에는 조합원 26명, 비조합원 14명, 소사장 아래 8명 등 총 48명의 레미콘노동자들이 일한다. 2001년 장기파업의 여파로 조합원들은 엄청난 빚을 져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비조합원이 생겨났다. 올초에는 다단계 하도급인 ‘소사장제’도 운영되고 있다. 조합원들이 일하지 않는 일요일 근무를 위해 필요하다는 회사측의 요구였다. 1년만 소사장제를 운영하겠다는 회사측의 각서를 받긴 했지만 악용될 소지는 언제나 열려 있다.

레미콘노동자들은 회사와 1년에 한번씩 계약을 반복하고 있는 계약직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회사에 직접 고용되어 기본급에 보너스, 퇴직금을 받는 정규직이었다. 90년대 중반 건설경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레미콘 회사들은 직영 레미콘 차량을 이들에게 불하하기 시작한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었어요. 안사면 잘리는데.” “목돈이 없다고 하면 회사에서 무이자 대출까지 해주며 월급에서 일정금액을 제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차를 넘겼어요.”

거의 모든 레미콘노동자들이 자기차를 소유하게 된 건 이런 식이었다. 하루아침에 ‘지입차주’가 된 이들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닌 ‘사장님’ 신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사장이지 이후 닥칠 삶의 위기는 ‘빛 좋은 개살구’임이 드러났다.


건설경기는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우후죽순 생긴 레미콘 회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덤핑을 쳤다. 설상가상 기름값은 하루가 다르게 솟구쳤지만 회사가 이를 보전해 주지는 않았다. “고스란히 우리가 떠안는 거죠. 10년 전 리터당 210원 하던 게 지금은 1천원이 넘잖아요. 그런데 회사는 운송비와 기름값을 매년 동결해요.”

골재나 레미콘 등을 생산하는 대형 레미콘 회사는 덤핑 여력이라도 있었지만 중소업체들은 이길 재간이 없었다. 죽지 않을 길은 오직 하나, 노동자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통한 착취였다. “뼈 빠지게 죽어라고 일했죠. 새벽 3~4시에도 나오고, 다음날 새벽까지 날 밤새며 일했어요.” “물량이 줄고 경영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노동자에게 차 떠넘기고, 기름값, 운송비 떠넘기고 있는 거예요.” 부당한 대우에 항의라도 할라치면 돌아오는 답은 오직 하나. “차 빼라.” 가족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에 레미콘노동자들은 회사의 노예 아닌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동복 건설운송노조 경기북부지부장의 설명이다.

“레미콘 차량은 팔아도 똥값이고, 다른 화물로 대체할 수도 없고 난감하죠.” “막노동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 종일 대기할 수밖에 없어요.” 조합원들은 막막한 현실의 불안감이, 비조합원은 또 회사로부터 무슨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조합원들이 파업하면 우리가 좀 더 일할 수 있겠지”라는 얄팍한 마음도 없을 수 없다.

현장 한 켠 다단계 하도급 업체인 소위 ‘소사장’ 휘하의 레미콘 차량도 파업 등 비상시를 대체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비조합원에 대한 우대, 소사장을 통한 통제 등 회사는 노조를 무력화할 각종 수단들을 쥐고 있죠.” 현장의 상황은 투쟁의 극단으로 가든지,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만 남은 듯 보였다.


“정부가 우리보고 죽으라면 죽어야죠”

생존의 위기에 처한 이들이 여의도 국회 앞으로 모였다. 21일 전국건설운송노조 파업결의대회에 모인 수도권 지역 레미콘 노동자들.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과 유가보조금 지급, 다단계 하도급 철폐 등의 요구를 내걸고 그들은 외쳤다. “끝까지 투쟁해서 기어이 승리하자!” “레미콘, 덤프 공동투쟁 파업투쟁 승리하자!” “우리도 노동자다 노동기본권 쟁취하자!”

수원 동진레미콘에서 왔다는 40대의 한 조합원은 결의를 다지면서도 침울한 표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힘들죠. 얘들은 커가는 데 월급은 100여만원 안짝이니….”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삶은 다들 비슷해 보였다.

화성의 유진레미콘은 2001년 파업 이후 64명의 운송노동자 가운데 17명만이 조합원으로 남았다. 나머지는 다단계도급인 ‘소사장’ 2인의 물류회사 소속이다. “97년에 회사차 불하받을 때 회사에서 안 받으려면 나가라고 하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받은 거죠.” 이 회사의 최영규(51) 조합원은 허울 좋은 사장일 뿐이라며 비판했다.

영등포 열린우리당사로 행진을 하려고 일어선 순간 삼베두건과 완장 등 장례용품을 착용한 레미콘 노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세상이 죽은 사회이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자는 의미입니다.” 우신레미콘의 김윤기(50) 조합원은 자식들 어떻게 먹여 살리냐며 항변했다.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데, 회사에서 받는 킬로미터 당 0.6리터로는 한달 30~40만원이 적자다. 운반비는 10년 전 보다 낮아졌다. 물량은 예전 잘나갈 때의 3분의1 수준이다. 차량수리비, 보험료,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 나갈 돈은 그대로다. 회사로부터 억지로 떠맡은 레미콘 차량은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물류대란’이니, 건설현장 ‘공기지연’ 운운하고, 정부는 강경대응으로 으름장을 놓고 있다. “차량을 끌고 나오면 면허를 취소하겠다는데. 정부가 우리보고 죽으라는 소리죠. 그럼 별 수 있나요. 부양가족 내다 버리고 죽어야죠.” 그는 화물, 덤프와 달리 유류보조금에 차이를 두고,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은 형평에도 어긋나고, 우는 아이 떡 하나 주고 달래겠다는 심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사장은 무슨 얼어 죽을 사장.” 레미콘 노동자들은 죽을 맛이다. 유가보조금 지급, 운송단가 현실화, 현장에 만연한 다단계하도급 철폐, 노동3권 보장. 레미콘 노동자들의 아주 오랜 ‘생존’의 요구는 절박하다. 1년 365일, 투쟁하는 사업장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편집자 주> 현대하이스코 비정규 노동자들이 마침내 원청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아차 비정규 노동자들은 최초로 하청업체들과 노조인정 및 고용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단협을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산업, 업종, 성별, 연령을 불문하고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운동의 미래를 여는 힘이 되고 있다. 노조간부가 비리로 구속이 되든, 민주노동당이 울산북구에서 상상할 수 없던 패배의 고배를 마셨든, 역사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

<매일노동뉴스>가 사단법인 한국비정규센터와 공동기획으로 <비정규노동자들의 세계>를 마련하고, 오늘자부터 지면에 게재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세계>는 1주일에 3번, 산업별, 업종별로 <작업르뽀>, <비정규 노동운동가 열전>, <정책대안>으로 나눠 연재된다. 이 기획이 희망을 찾는 비정규 노동자들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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