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여성이라고 했을 때 아직도 흔히 ‘여성다움’을 요구한다. 예쁘고, 착하고, 순종적이며 걸음도 예쁘게 ‘걸어야’ 하는 우리 여성들의 삶은 그러나 예쁘게만 살아지지 않는다. 예쁘면 그만큼 남성들에게 섹슈얼하게 느껴지게 하고, 순종적이면 여성들의 삶은 그만큼 순종된 삶을 요청받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최근 여성들의 변화된 삶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드라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즐겨 보시는 중에 오가며 슬쩍슬쩍 보다가 나중에는 이야기 전개가 꽤 흥미 있어 결국 엉덩이 깔고 보게 된 것이 ‘굳세어라 금순아!’다. ‘금순아’는 조부모-부모-자녀의 3대로 구성되는 전통적인 가정형태가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양(兩)부모-친자녀’의 전통적인 가정을 ‘정상’이라고 보는 문화 속에서 미혼모나 이혼녀, 과부가 예전처럼 선택되어지는 삶과는 달리 비교적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려는 노력들이 나를 TV 앞으로 유인하는 요인이었다. 

드라마를 통해 본 ‘가족’의 한계

그러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 이른바 아이 달린 여성의 재혼이나 호주제에 대한 내용들을 비교적 잘 다루고 있지만 여전히 양부모-친자녀를 전형적인 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금순이처럼,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지만 안정된 전문직과 재력을 가진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드라마 내에서 모든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극 속의 이혼녀나 과부들은 결국 ‘양부모-친자녀’의 모델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급증하고 있는 한부모 가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남성중심의 사회환경적인 요소들은 여성 스스로의 활동의지를 위축시키며 어느새 인가 남성, 혹은 남편을 그 지향점으로 삼게 한다. 사회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극중 구재희의 엄마(미혼모)까지도 상처(喪始)한 아들의 아빠를 찾아간다는 내용은 이를 반증한다.

둘째, 여전히 가사노동이나 육아는 전적으로 여성의 역할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밤늦게까지 파머 연습을 하는 금순이는 매일 아침식사 준비를 도맡아 할 뿐 아니라 퇴근 후에도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일쑤다. 얼마라도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우유배달도 아이를 등에 업고 하는 ‘강인함’까지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고정적 역할에 대한 반론은 많은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해 제기된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남녀의 역할은 태어나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규정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퇴근하고 돌아온 금순이는 거의 매일 저녁식사 준비에 분주한데 시동생은 차려다주는 밥을 먹기만 하는 수고로움만을 책임진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남성이 왜 먹는 수고로움만 감당해야 하는지. 

여성의 노동권·정치적 지위가 먼저

마지막은, 노동생활과 마찬가지로 가족 내에서 드러나는 남성 중심적인 위계질서이다. 시아버지는 평소 비교적 관대하고 융통성 있는 모습으로 부부가 서로 상의하지만 최종 결정은 여전히 시아버지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호주제 문제를 놓고 끝까지 거부한 것이 시아버지라는 점에서 남성들의 혈연에 대한 강한 집착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둘째 시숙하고의 말씨에서도 드러난다. 시숙의 일방적인 하대와 금순이의 일방적 존대로 일관된다. 친근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일방적이다. 지금도 여성이 전화를 받을 때 가끔 말을 반도막씩 잘라먹는 남성들!

거창하게 ‘여성해방’이라는 이야기를 들지 않더라도 최근의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경고는 우리들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밑바닥부터 다시 고민해야 함을 드러낸 것이다. 단시안적인 모성보호정책이나 출산장려정책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선진국의 경험에서 보듯이 여성들의 노동권과 정치적 지위를 보장할 때만 자연스런 모성보호를 통해 출산율은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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