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리자는 운동이건만 운동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과로에 스트레스에, 그리고 조직사업의 ‘필수’라고 여겨지는 술까지. 때문에 몇몇 조직에서는 장기근속자를 대상으로 안식휴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휴가를 보낸 공공연맹 이상훈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이 안식휴가 일기를 <매일노동뉴스(레이버투데이)>에 보내왔다. 매주 화요일,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약력
1969년 출생
1997년 전국민주철도지하철노조연맹 조직부장
1999년 공공연맹 조직부장
2004년 공공연맹 미조직비정규실장
현재 공공연맹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
나는 이번 안식휴가 중에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좋은 인연으로 소중한 세 권의 책을 청계천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럼 먼저 좋은 사람들 얘기부터 하자. 나는 안식휴가를 지내면서 연맹에 출근할 때보다 아이 돌보는 시간이 늘었다. 더구나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다보니 각종 아마활동(아빠, 엄마가 어린이집 운영에 참여하는 활동, 예를 들어 저녁아마, 평일아마, 청소아마 같은)에 아내보다는 내가 참여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어린이집에서도 갑작스레 아마가 필요하면 제일 먼저 내게 전화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린이집에서 평일아마(하루 교사활동)를 하게 되었다. 오전 바깥 나들이가 끝나고 아이들은 흙 묻은 손발은 아랑곳없이 큰방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궁금했다. 큰방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쳐다보니 선생님은 그림책 한권을 활짝 펴들고 있고 아이들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림책에 빠져 있었다. 한 장 한 장 그림책이 넘어갈 때마다 아이들은 깔깔깔 웃기도 하고 무서워 눈을 가리기도 하며 재미나게 놀았다.


점심시간에 나는 아이들은 주로 어떤 그림책을 좋아하냐고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은 간단히 말했다. 아이들 기분에 따라 다르다고. 여기저기서 좋다고 하는 그림책도 부모들이 좋아하는 게 따로 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한 책은 어른이 먼저 보고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사실 글자 수 적고 그림 많은 그림책을 좋아한다. 아이에게 빨리 읽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한심했다. 이번 안식휴가 중에 아이들 책 공부라도 해야겠다 싶어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동화읽는어른>이라는 모임을 알게 되었다. 이 모임은 어린이 책을 아이들에게 잘 읽어주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먼저 어린이 책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엄마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모임이었다.

일제시대 동화, 카프계열 문인들 작품 많아

2주 동안 3가지 기본강의를 들었다. 그림책에 대해서, 우리 창작 동화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옛이야기에 대해서 강의를 들었다.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 흥미로웠다. 모임에서 추천해준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얘들 책이 이렇게 재미난 줄 처음 알았다. 내가 어렸을 때 읽고 들었던 것들 대부분 우리 얘기가 아닌 다른 나라 얘기란 걸 알게 되었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도 아이들 책이 아닌 어른 소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본강의가 끝나고 우리 창작 동화를 중심으로 책 읽기 모둠이 시작되었다. 방정환 선샘의 작품들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주홍의 <돼지 콧구멍>,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 등 사실 처음 들어본 작가 이름들이 수두룩했다. 방정환 선생이 원래 동화작가였고 당시 유명한 이야기꾼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려서 읽어본 동화는 거의 없었다. 물론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우리 아이들이 즐겨 읽었던 동화들은 대부분 카프문학계열의 문인들이 많이 썼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쓰는 것도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이었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90년대에 들어와서야 하나 둘씩 복원되었기 때문에 내가 어렸을 때는 교과서에서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아이에서 모든 아이로’

<동화읽는어른>은 전국 조직이다. 지자체를 기준으로 140개 넘는 지역모임들이 활발히 활동한다고 한다. 처음엔 엄마들이 자기 아이에게 좋은 책을 읽어주고 싶은 마음에 동화모임에 발을 들여놓지만, 좋은 책을 서로서로 권하면서 함께 읽다보면 자연스레 ‘내 아이에게’라는 욕심은 차츰 이웃 아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넓어진다고 한다.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내 아이가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잘 자라야 결국 내 아이도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동화읽는어른> 모임은 ‘내 아이에서 모든 아이로’라는 기치로 지역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좋은 책 한권은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건강하고 즐겁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책, 동화책 하나 가득 가방에 넣고 이 골목 저 골목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엄마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처음엔 내 아이에게 좋은 책 읽어주려는 마음에 이 모임을 찾았다. 그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나는 아이를 진정 잘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을 하나 배웠다.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어른들이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어린이 책 한권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헌책방에서 만난 세 권의 책

나는 <동화읽는어른>의 교양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옛이야기 또한 우리 민요나 우리 먹거리처럼 구성지고 재미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 적다보니 아이들이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던 옛이야기를 잘 알지 모른다고 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교양강의를 했던 선생님이 우리 옛이야기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옛날 설화집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시중 서점에서는 살 수 없고 청계천 헌책방에나 가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여 주었다.

며칠 후에 시내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어 종로에 가던 참에 청계천 헌책방 골목을 들렀다. 고등학생 때 좀 싸게 참고서를 살 요량으로 자주 들렸던 청계천 헌책방 골목. 청계천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그 모습들은 여전했다.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다 몇 권의 설화집을 샀다. 그리곤 어려서 어머니 따라 재래시장에 간 것처럼 이곳저곳에 한눈을 팔며 돌아다녔다. 그러던 참에 한눈에 들어오는 헌책 세 권이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일제 강점기 한국노동소설 전집>이었다. 모두 세 권으로 구성된 전집이었다. 마치 낯선 곳에서 오랜 고향친구를 우연히 만난 기분이랄까. 순간 지갑에서 돈을 꺼내 재빠르게 계산을 치렀다. 누군가에 쫓기듯이 말이다.

70년 훌쩍 넘긴 노동소설…노동자 삶 그때나 지금이나

출판사와 출판년도를 보니 오래된 책은 아니었다. 1995년 <보고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온 책이었다. 1995년 정가보다 5천원 정도의 웃돈을 주고 샀다. 전집을 엮은 안승현씨는 일제하 노동소설은 ‘노동소설’이라는 장르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한국프로문학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 문학이라고 했다.

1920년부터 1938년 사이에 작가 40명이 발표한 중·단편 98년을 수록한 이 전집은 당시 노동소설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은 모두 실었다고 했다. 카프작가 뿐만 아니라 동반자 작가, 아나키즘 작가, 무명작가 특히 노동자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고 했다.

나는 이 세 권의 전집 중에서 송영, 현진건, 한설야, 유기정, 이북명씨의 작품을 주로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현진건씨의 <운수 좋은 날>이 노동소설이라는 것은 이 전집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북명이라는 노동자 출신 작가의 작품들은 당시 노동현장을 머릿속에 쉽게 그릴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유안직장은 회전하는 기계 소음과 벨트 돌아가는 소리로 웅- 웅- 소리가 났다. 아스팔트 지면과 콘크리트 벽이 지진 때처럼 진동했다. 암모니아 탱크에서 새는 기체 암모니아는 눈, 목, 콧구멍을 심하게 적셨다. 포화기에서 발산하는 유산 증기와 철이 산화하는 냄새와 기계기름이 타는 악취가, 그다지 넓지도 않은 직장 내에서 산화하여 일종의 독특한 악취를 직장 내에 감돌게 하고 있었다. 목이 아프고 콧물이 흐르고 눈에서 눈물이 나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직공들은 가제로 마스크를 만들어 쓰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의 찢어진 우산 같은 것이었다.” - 이북명의 <질소비료공장> 중에서 (1935년 일본잡지 문학평론에 수록된 작품)

나는 요즘 2003년에 분신한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간부 이용석 노동열사의 평전을 소설로 만들고 있다. 이 평전 작업을 준비하면서 이러저런 노동소설들을 읽어보기도 했다. 일제시대 선배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노동소설을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보니 그 느낌이 새롭기도 했지만 마음은 편하질 않았다. 착취받고 억압받는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다.

물론 나보다 먼저 이 전집을 또는 이 노동소설을 읽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전집을 아직 못 읽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언제든 내 책장에 꽂혀있는 이 전집을 빌려 읽어도 좋고, 가져가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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