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이, 대한이, 은영이, 누리, 호야.’ 이주노동자 가정과 그들의 자녀를 양육, 지원하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부설 ‘코시안의 집’ 아이들이다. 코시안은 ‘KOREAN’과 ‘ASIAN’의 합성어. 이주노동자 가정과 자녀를 부르는 호칭이다. 낯선 기색도 잠시.

“안녕하세요.”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어린이들. “사진 예쁘게 한번 찍어볼까”라는 말에 아이들은 앞다퉈 친숙하게 다가온다. 승리의 ‘V’자를 그리고, 동화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제 이름을 쓴 학습장을 내밀기도 한다.

아이들의 아빠는 조선족, 스리랑카, 중국, 몽골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이다. 안산에는 줄잡아 5만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결혼도 늘어났다. 안산시 단원구의 경우, 지난 9월말까지 혼인신고를 한 1,691쌍 가운데 18%인 306쌍이 국제결혼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근 시화공단을 끼고 있는 시흥시도 올들어 혼인신고를 한 2,448쌍 가운데 8%인 198쌍이 국제결혼일 정도다.

현재 코시안의 집은 6세 미만의 영유아들 15명, 초등학교 이상 어린이가 15명 정도를 돌보고 있다. 퇴근 후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부모들을 위해 매일 저녁9시까지 아이들을 돌본다. 부모들은 일용직이 대부분. 가정 형편이 어렵다 보니 분유, 기저귀 값 등 실비만 받는다. 아이들 우유 먹이랴 대소변 도와주랴 분주한 코시안의 집 김양애 선생님. “고용허가제 이후 일을 못하시는 분들이나, 새벽에 일하러 갔다가 단속돼 추방되거나 해서 인원은 유동적이에요.”


“얘, 언제까지 있나요.”

우리 정부는 2003년부터 아동권리 국제협약을 좇아 초·중교 의무교육을 개방했다. 그러나 정식 입학, 졸업이 아닌 청강생 신분이다. 교장 재량에 따르다 보니 학교마다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는 학교에서 조차 “얘 언제까지 있나요”라며 부담스러워한다. 교육은 받도록 했지만 일시적인 미봉책에 그칠 뿐이다.

안산의 원곡중학교에는 6명의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이 재학중이지만 모두 청강생 신분이다. 그나마 이 학교는 초등학교 ‘수료증’밖에 없는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을 잘 받아주기로 소문나 있다.

경제적 부담과 불법체류 사실이 발각될까봐 많은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교육은 제도권 밖에 머물러 있다. 이주노동자 가정은 부부가 대부분 맞벌이이고 경제적으로 어렵다. 이 때문에 이들 자녀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과정, 방과 후 교실 등 특별프로그램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학교에는 이런 아이들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이나 지원체계는 없다. 편견과 차별 해소를 위한 통합교육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제도권에서는 의사소통이나 정서상의 문제, 비용문제 등이 있죠. 그러나 결국 교육은 통합의 흐름으로 가야합니다.” 코시안의 집 김영임 원장은 이를 위해 두 가지를 강조했다. 타국에 대한 존중과 소수자를 배려하는 인권교육. 또 하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해 영주권과 체류권을 주고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녀를 둔 이주노동자 부모의 고민과 존재의 정체성을 고민할 아이들을 만나 보기 위해 휴일 안산을 다시 찾았다. 서울 시내에서 지하철4호선을 타고 1시간 넘게 가야 안산역에 도착한다.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일명 ‘국경 없는 마을’. 이주노동자와 내국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다문화 공동체를 지향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안산역에서 나와 지하보도를 건너자 일명 ‘국경없는 거리’가 펼쳐진다.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중국 식당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다양한 먹거리와 많은 인종과 민족이 어울리는 곳.


각국 식품점과 환전소는 물론 국제전화 부스에 몰려 든 사람들로 휴일의 거리는 활기에 차 있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타도 각국의 이주노동자들로 북새통이다. 아침 예배를 마치고 점심을 먹는 사람들. 독감예방주사를 맞으러 채비를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서울대공원에 단체로 놀러가기 위해 기다리는 학생들….

“재미없어요. 얘들이 자꾸 짜증나게 해요”

“공원은 이제 지겨워. 서울랜드로 가지.” 부모, 선생님의 마음과는 달리 놀이공원에서 실컷 놀고픈 아이들. 김치나 야채보다는 고기 종류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 똑같다. 피부색과 생김새만 조금 다를 뿐 한국말도 유창하다.

몽골소녀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시화초등학교 5학년인 김혜린(15)은 이주노동자 자녀들 가운데 큰언니다. 3학년 때 전입해서 학교생활도 꽤 적응이 되었다. “친구들도 잘해주고 (학교생활이) 재밌어요.” 다른 한국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지만 티내지도 않는다. ‘언니’라고 부르는 반학생들에게 ‘친구’로 부르라고 한다.

방과 후 학원에 다니지는 못해도 혜린이에게는 코시안의집 친구들이 있다. 방과 후엔 거의 매일 몽골 친구들과 시화 집 근처에서 자전거를 탄다.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명랑소녀. 예체능에 소질을 보이는 혜린이는 가수가 꿈이다. 효리, 신화, SS501을 좋아하고, 그들의 노래를 즐겨 따라 부른다. 선생님과 어른들이 부르라고 권하는 ‘동요’는 그저 시시할 따름이다. 여느 초등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같은 학교 4학년 이수정(13)은 진작부터 뾰루퉁해 있다. “저는 재미없어요. 없거든요. 얘들이 자꾸 짜증나게 해요.”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아이들이 몽골에서 왔다고 놀리기 때문이었다. 아이들끼리는 외모가 조금이라도 자신들과 틀리거나 말이 어눌하거나 하면 으레 짓궂게 놀리기 일쑤다. 심성이 착한 수정이는 항의의 수단으로 말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마음을 닫으면 닫을수록 여린 마음의 상처는 커지는 법.

텔레비전에서 <징기즈칸>을 보느냐고 물었다. 몽골은 대제국을 건설한 자랑스런 민족이고 나라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러나 아이들의 돌아오는 즉답은 허무했다. “그런데 배우들은 다 중국사람들이에요.” 본전도 못 건졌다. 섣불리 아이들을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후회가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소녀들은 의자에 앉아 사과를 베어 물며, 휴대폰으로 친구들과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 되면 말 붙이기가 쉽지 않다. 몸은 훌쩍 커버리고, 변성기도 찾아오니 말이다. 중학교 1학년인 장은석(16)군은 동생들을 챙기고 도와주는 맏형이다. “특별한 건 없어요. 떠들면 ‘조용하라’고 말하고….” 역시나 투박하다. 서울 광진구의 ‘몽골학교’에 다니다가 집에서 너무 멀어 올해 원곡중학교로 옮겼다.

“재미없어요. 외국(한국)에서 공부하는 거니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국이름, 한국말을 쓰고는 있지만 언제나 ‘이방인’에 머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은석이와 몽골소녀의 마음 속 한켠에는 몽골의 드넓은 초원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은석이는 또래가 공부하는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속상한 일이었다. 중간에 들어오면 치러야 할 홍역과도 같을 것이다. “비밀이에요.” 은석이의 장래희망은 알 수 없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비밀을 알기에 시간은 너무 부족했다.


“검은 피부라 안 된다는데….”

자녀의 교육문제는 이주노동자 부모에게도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공부가 제일 걱정이죠. 대학교까지 보내고 싶은 마음인데.” 원곡중학교에 곧 진학할 예정인 현수(15)의 엄마 토기는 남편 에릭카와 함께 몽골에서 한국으로 떠나온 지 5~6년의 세월이 흘렀다. “2년여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었어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현수 때문에….”

부모의 마음은 항상 자녀에게로 쏠린다. 시화공단에서, 인근 공사판에서 맞벌이를 하면서도 그들의 꿈과 희망은 아들에게 향해 있었다. “현수야 이리 와서 같이 이야기하자. 응.” 한국말이 서툰 엄마의 거듭된 요청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수는 또래와 어울릴 뿐이었다.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하산뜨(32)는 결혼 후 지난 97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아내 야무나(31)는 두해 뒤 한국으로 와서 아들 하영광(6, 미노윈)을 낳았다. 저임금, 장시간노동, 체불 등 여느 이주노동자와 다를 바 없었던 생활. 고용허가제 이후 하산뜨는 2년여 단속을 피하느라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집안에 꽁꽁 숨어 지내며 아들을 돌봐야만 했다. 그 기간 돈벌이는 아내의 몫이었다. 야무나는 남자도 힘들다는 가죽공장에서 일하다 손목의 인대가 늘어나 수술까지 해야 했다.

그나마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분유, 기저귀, 옷가지, 쌀, 생필품 등을 지원해주지 않았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수술할 비용이 없어 쩔쩔맬 때, 건강보험증도 없어 감기, 몸살 등 아기가 아플 때 센터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센터와 동네 주민들의 도움과 친절에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그들의 표정은 온유했다.

무료 보육기관에서 영광이를 키웠듯 부부는 내후년 초등학교부터 군대에 보낼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부부에게도 걱정은 많다.

“베트남, 인도네시아인들은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받아들이면서 검은 피부니까 안 된다고 해요.” 야무나씨가 겪었던 구직과정에서의 체험. 심지어 손 등을 만져보면서 “검은색이 묻어나진 않네”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편견과 차별을 아이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두 부부는 스리랑카에서 잘 나가던 육상선수였다. 특히 야무나씨는 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 출전해 400미터 계주 금메달을 딴 스리랑카 육상 국가대표 출신이다.

“스리랑카 언어와 문화도 조금씩 가르쳐 주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가 너무 한국말만 해서 답답할 때도 있어요.” ‘미노윈’을 부르면 대답이 없는 아들. “영광아! 이리와.” 그제서야 달려오는 아들을 바라보는 이주노동자 부부의 표정은 밝을 수만은 없었다.


“가풍있는 집안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또다른 이주노동자 가정. 아내가 한국인의 경우는 아이들 교육 등에서 사정은 좀 나은 편이다. 일단 국적을 취득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이들 한국이름은 엄마의 성을 따랐다. ‘코시안의 집’ 마스코트로 잘 알려진 대한(5)이의 엄마 지옥희(29)씨. 다문화교회에서 만난 스리랑카인 남편 ‘산주’씨와 지난 1998년 결혼해 대한, 대성(2) 두 아이를 두고 있다.

“아이들이 피부색과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당할까 걱정이에요.” 독감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씨. 그의 말투와 외모만으로는 그가 한국인임을 단박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부부가 살면서 닮아가기 때문일까? 생김새와 말투로 한국인임을 구별하려고 하고, 할 수 있으려니 하는 기자의 시각은 착각이었고, 잘못된 판단이었다.

큰 눈에 오똑한 콧날, 까무잡잡한 피부의 영민(5)과 예린(4). 두 아이의 엄마인 한국인 유미(32)씨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결혼. “가풍있는 집안에서 그것도 무남독녀가 집안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집안의 반대와 욕도 엄청 먹었다.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친정부모님이 이해는 하지만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남편이 최근 국적을 취득해 아이들 교육문제는 크게 걸릴 것이 없다. “아이들이 나중에 학교가거나 사회생활하면서 상처 입을까봐 그게 걱정이죠.” 유미씨의 고민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어머 쟤는 왜 저렇게 시커매.” “외국사람인가봐.” 우리사회의 편견과 차별은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살색 없애기’ 캠페인을 벌여도 살색의 추억은 오래간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의 피부색은 ‘살구색’만 있지 않다. 노랗고, 하얗고, 검은 한국인들이 속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단일민족의 신화는 이미 깨어지고 있다. ‘국경없는마을’ 안산의 휴일은 형형색색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주노동자 자녀들 ‘교육권 보장·제도개선’ 나서야
                                                                                                이은하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지역복지팀장


2001년 3월 교육인적자원부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자녀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행정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2003년 1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로부터 ‘모든 외국인 어린이에게도 한국 어린이들과 동등한 교육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받기에 이른다.


2003년 1월19일 개정된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19조 1항은 “재외국민 또는 외국인이 보호하는 자녀 또는 아동이 국내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나 최초로 전입하는 경우 출입국사무소장이 발행한 ‘출입국에 관한 사실증명서’ 또는 ‘외국인등록사실증명서’를 거주지 관할 해당 학교의 장에게 제출함으로써 입학 또는 전학절차를 갈음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한국 정부가 1991년 12월20일 비준한 ‘아동권리에 관한 협약’을 준수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교육적 차원에서 불법체류 외국인 자녀에 대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교육권 실태는 어떨까? 2004년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를 방문한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 자녀 22명을 대상으로 벌인 ‘외국인노동자 자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학교에 입학한 아동은 50%이며, 몽골학교에 다니는 아동은 31.8%, 학교에 다니지 않은 아동은 18.2%를 보였다.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은 한국에 있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하며(68.2%), 이들의 연령은 10세에서 12세(59%)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자녀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자신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어의 어려움이 압박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친구들과 견줘 성적이 낮을 수밖에 없고, 입학할 때 학년을 낮추어 들어가기 때문에서 오는 교우관계의 어려움도 있다. 이런 경우가 지속되고 방치되어 결국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15세 이상 청소년들은 자의반 타의반 일자리를 찾아 노동현장에 들어가기도 한다. 부모가 불법체류자인 경우 사태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부모가 단속을 피해 지방이나 외진 곳으로 일자리를 옮겨 다니면 자녀들은 오랫동안 혼자 지내거나 이리저리 학교를 옮기게 된다.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교육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정서적 지원을 통해 문화적 적응을 도와야 한다. 우선 한글교육 및 학습, 취미, 성교육, 방과 후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이주노동자와 자녀들의 한국 내 삶의 애로사항도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교우와 교사들이 다양한 이주노동자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교육도 절실하다. 이 내용들은 ‘지구촌 학교’라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은 위한 대안학교에 적용해 지난 4월부터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내에서 운영해오고 있다.


무엇보다 학교 교사들이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실수들이 많다.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교육권의 문제는 주로 한 사람이나 단체가 나서서 한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주노동자들의 교육권과 제도의 개선 방향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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