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동네 사람들에게 똑똑하고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영희는 오래 전부터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다. 영희는 중 3이 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성적이 중상정도라 인문계에 가서 상위권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관광정보학과가 있는 여상에 가서 내신을 잘 받아 동일계 특별전형으로 전문대 항공운항과를 가기로 정했다.

영희는 자기 계획이 제법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방 이모, 삼촌들이 수 십장이나 되는 스튜어디스에 대한 대학정보, 취업정보 자료를 보여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영희는 고등학교에 가면 공부방을 그만 둘 생각이었다. 스튜어디스가 되려면 영어회화학원에 다녀야 하는데 공부방에 다니면 학원에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방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다녔으니 9년째다. 공부방은 때로는 집보다 편하고, 학교보다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여러 모로 자기와 닮은꼴인 공부방 친구들은 가족보다 더 따뜻하고 의지가 되었다. 하지만 공부방은 늘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영희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고 있어 가끔 현실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숨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던 영희

영희가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어 하는 까닭 중에 하나는 바로 지긋지긋한 가난과 결별하기 위해서다. 또 궁상맞은 공부방 친구들보다 잘 살고 똑똑한 친구들과 사귀고 싶기 때문이다. 영희는 공부방에서 찾아 준 100쪽 가까운 대학별 요강과 스튜어디스 모집 공고를 몇 번이고 다시 살폈다. 그런데 대학별 요강을 살펴보니 전문대 항공운항과에서는 실업계 출신은 받지 않았다. 각 대학의 특별전형도 영희가 가진 조건과 너무 멀었다.

더욱이 대학을 졸업한 뒤 항공사에 입사하려면 영어로 1대 1 면접이 가능해야 하고, 만 23세라는 나이 제한까지 있는 곳이 많았다. 스튜어디스가 되려면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해서도 안 되는 셈이었다. 영희는 얼마 전 담임한테 우겨서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갔다가 크게 좌절을 하고 돌아왔다. 영어대회는 그 흔한 영어학습지 한 번 못해본 영희가 부딪친 첫 번째 벽이었다. 그런데 그 충격은 아무 것도 아닌 셈이었다.

영희네 아빠나 엄마는 술만 마시면 모두 영희만이 희망이라고 되뇌었다. 똑똑한 영희가 의사가 되거나 스튜어디스가 돼서 집안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희네 집 형편은 학습지조차 할 수 없었다. 3년 전 영희네 식구들은 동네 어귀에다 식당을 차렸다. 엄마가 회사 식당을 그만 두고 받은 퇴직금,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남은 돈을 톡톡 털었다. 영희네 일곱 식구의 생계와 미래를 걸었다.

하지만 식당은 늘 파리만 날렸다.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이 다시 시작되었다. 엄마는 아빠의 술주정에 밤새 시달리고 나면 아침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겠다고 소주잔을 비웠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니 아빠와 큰오빠가 다시 노가다 판에 나가 푼돈을 벌어왔다. 엄마는 여전히 영희만이 희망이라고 하면서도 식당에 일손이 딸리면 공부방 대신 주방으로 영희 등을 떠밀었다. 

스튜어디스의 꿈은 사라지고

영희는 어려서부터 죽어도 엄마나 아버지처럼 그리고 스무 살도 안 돼 부모가 된 올케나 큰오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서 구질구질한 이 동네를 떠 떵떵거리고 살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170 센티미터를 넘자 영희는 환호성을 질렀다. “됐다. 됐어.” 하지만 스튜어디스가 되기 위해 영희가 가진 것은 170센티미터의 키와 쌍꺼풀 진 눈뿐이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관광정보학과를 나와 일본인 관광가이드를 하겠다던 공부방 선배가 신공항에 있는 호텔 휘트니스 센터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그만 두고 공장에 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무슨 꿈을 꿔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하다. 그렇지만 영희는 아직도 자기네 집이 빈민이 아닌 서민이라고 생각한다.

영희는 엄마가 영희네 삼남매와 나이 마흔에 본 손주, 손녀들을 위해 온 몸을 바쳤다는 것을 안다. 엄마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병과 술에 찌든 몸뿐이다. 그래서 영희는 엄마에게 여전히 희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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