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연구원에서 비공식적인 커피 심부름이 문제된 적이 있다. 높으신 한 분의 ‘유독 지나친’ 커피 심부름을 막기 위하여 일부 여성들이 머리를 맞대고 온갖 전략전술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그 대안으로 작은 커피자판기를 들여놓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커피 자판기의 상표는 이름도 당당하게 ‘미스 리’였다. 어쨌거나 자판기 ‘미스 리’의 존재는 겉으로는 불편한 문제를 해결해 준 듯 보였다. 그런데 우리의 ‘미스 리’조차 너무 많은 커피를 생산하다보니, 얼마 안가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세상을 향해 만들어내는 것이 과연 커피인지, 맹물인지, 사약인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노조에서 활동하는 ‘자판기’들

나는 노조에서 활동하는 ‘커피 자판기’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의 생산성은 놀라운 것이어서, 정해진 근무시간이 따로 없었다. 때로는 거의 잠을 자지도 않았고 집에 가지도 않고 일했다. 조직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 가장 늦게 올라왔으며, 몸싸움을 해야 할 때도 대부분 앞장섰다.

또 그들은 모르는 게 없었다. 임금·고용에서 각종 법률, 산업재해, 사회보장, 한국경제와 세계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게다가 자존심까지 강해서 별도의 ‘동력’을 공급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지나친 혹사로 별도의 동력이 필요할 때면 가끔씩 술을 부어주면 되었다.

한국노총에서 만난 자판기들에게는 특수성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특별히 ‘어용’이라는 애칭이 덤으로 주어졌는데, 상당기간 직접 들어본 사람으로서 소감을 말해도 된다면 ‘어려운 일을 용기 있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그 자체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말이기에,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의 자격을 의심받고 듣는 사람의 진실을 일깨우지도 못한다. 어쨌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혁을 원하고, 노력하고, 포기하고, 또 일어섰으나, 그러한 노력이 꼭 성공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판기의 마모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들의 능력과 헌신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노동조합은 자판기 개발을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80년대 대량생산되었던 자판기 생산방식은 90년대 이후 주문형 자체 소량생산방식으로 바뀌었는데도 웬일인지 가격이 올라가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기존의 자판기들이 생산하는 조직·정책 활동에 대하여 타성과 관료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또 이들은 궂은 조직 활동을 도맡아했으되, 어떤 이유에선지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심심치 않게 배제되었다. 일부 노회한 자판기들이 장난을 치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을 수 있으나, 다수 자판기들의 진실은 아니다. 

자판기를 함부로 차지 마라

30여년간 노동조합에서 청춘을 바쳤던 선배 한 분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너희들은 활동가 이전에 참모들이다. 참모는 다른 정책과 다른 의견을 제출할 수 있어도, 노동조합의 의사결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돌이켜보면 때때로 생각이 같지는 않았어도, 그분의 삶은 노동계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노동조합을 그만두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노동조합의 ‘인적자원 관리’에 대해서 의문을 버릴 수 없다. 조직적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최소한 인간적인 의리와 동지에 대한 예의는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물며 결과적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인원 정리했던 일에 대해서야 두말해서 무엇하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 사람 힘들었던 시절의 상처를 헤집으려는 것이 아니다. 또 모든 자판기들의 성능과 목표가 같다는 것도 아니다. 최근 한국노총 산하 화학연맹에서는 일부 활동가들에 대한 징계 논란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또 한 사람을 해고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이기를 바라지만, ‘노조 간부들의 노조결성’과 때를 같이한 시점이다. 정당한 해고사유를 댈 수 없다면, 그는 복직되어야 한다.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는 일, 노조간부가 노조활동을 하는 일, 잘못된 일을 잘못된 일이라 말하고 바로잡는 일은 그들의 고유한 의무이자 권리 아닌가. 자판기, ‘함부로 차지 마라.’ 당신이 세상을 향해 따뜻한 커피 한 잔 뽑아냈던 적이 그 언제였던가.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