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가 열리기 전부터 박세일, 최장집, 이정우 등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각각을 대표하는 참석자 면면을 두고 관심이 높았던 대화문화아카데미 창립 40주년 기념 대화모임.

‘민주화, 세계화 시대의 양극화’를 주제로 한 지난달 29일 대화모임은 미리 배포된 발제문에서처럼 최근 참여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주목받고 있는 고려대 최장집 교수와 참여정부의 경제·사회정책 입안자인 경북대 이정우 교수 간 설전이 예상됐다. 이를 의식한 듯 이정우 교수는 “저한테 비판이 많이 들어올 것 같으니 발언시간을 많이 할애해 달라”고까지 말했으나 50여명이나 되는 참석자에 비해 토론시간이 짧았던 탓인지 기대만큼의 격론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서울대 박세일 교수가 “경제사회 시스템의 자기변화 능력이 느려 양극화가 발생한다”며 ‘국가능력 부족’을 거듭 강조하는 등 한나라당 전 정책위 의장다운 면모를 과시해 주목을 끌었다.


이정우·최장집, 양극화 원인 진단은 같았지만

우선 양극화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이정우, 최장집 교수 모두 같았다. ‘박정희 모델’로 불리는 국가주도형 산업화·발전전략으로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동안 특권과 독점, 불공정과 부패로부터의 이익, 막대한 불로소득의 특정계층 집중이 이뤄진 반면 기본적인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성립되지 못한 채 광범위한 인권억압과 노동배제가 이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양극화 해소 방향에 대한 해법은 달랐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의 ‘동반성장’론을 강조하면서 “기업들은 대기업-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 타파, 유기적 분업관계 강화, 일자리 창출에 힘을 모으고, 노조도 정규직-비정규직간 임금격차와 차별해소를 위한 노력과 사회적 협의체제 구축에 참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참여정부는 2년 반 동안 경제와 정치체질을 고치는 데 주력해 왔다”고 말했다.

또한 이 교수는 “최근 경제학 연구는 분배개선, 복지지출이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며 “양극화 극복을 위해 개별주체의 효율성만 강조하는 시장논리를 넘어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데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최장집 교수는 “현 정부는 국가기구와 경제관료 행정체제에 오히려 의존했고, 스스로의 정책노선과 이를 집행할 경제장관을 갖지 못했으며 여전히 친재벌-반노동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고 ‘동반성장론’을 혹평했다.

또한 최 교수는 “이미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화 수준은 미국을 능가했지만 여전히 비정규법안 관철 시도에서 보듯 유연화 확대를 꾀하고 있다”며 “권력을 시장에게 넘긴 채 정부가 시장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역할은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최 교수는 “현 정부의 국가-재벌연합이 주도하는 성장정책은 중소기업 약화, 고용의 질 저하 및 불안, 노동시장 양극화, 임금수준 하락 등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며 “분배구조의 양극화가 불황의 장기화를 초래하는 만큼 다품종 유연생산체제 등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산업정책에 의한 산업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세일, “문제제기는 잘 하지만 해결책은 20세기적”

반면 박세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양극화 현상의 원인은 기술변화의 속도보다 구조조정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기 때문에 양극화가 발생한다”며 경제성장률 하락, 교육개혁 실종, 교육-고용-복지의 3각 네트워크 미비 등 3가지 축에서 우리의 문제가 있다고 짚었다.

박 교수는 지난 1990~97년 사이의 평균투자율이 9.6%였던 반면 최근 4년간 0.3%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는 이자율이나 시장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인데, 투자선택 기준이 경제 그 자체보다 정치사회적 영향을 더 받은 측면도 있다”며 “분배가 성장에 기여한다고 보더라도 성장을 해야 분배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박 교수는 “진보는 문제제기는 잘하지만 제시하는 해결책은 20세기적이거나 선진제도의 이식과정에 대한 이해부족이 많고, 보수는 부족하지만 나름의 문제해결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문제의식 자체가 치열하지 못하다”며 성장과 분배를 보는 20세기적 제로섬(zero-sum) 대립관념을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박 교수는 “우리나라 정치와 행정은 국가정책의 기본 방향을 크게 바꾸고 재창조할 정책구상능력이 대단히 허약하고 정책추진 능력이 떨어지고 있으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정책학습능력이 거의 없다”고 비판했다.

‘노동’없는 민주화, ‘자유’없는 민주화

박 교수는 이와 함께 “최장집 교수의 지적처럼 ‘노동’없는 민주화가 문제라면 ‘자유’없는 민주화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권위주의식 소수지배에서 다수지배로 넘어갈 때 중요한 것은 다수가 소수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포퓰리즘(대중추수주의) 정책으로 소수의 인권과 자존이 무시되는 현 상황이 우려스럽다”며 “이를 제대로 발전시켜내지 못하면 민주화 실패와 함께 좌우모두 선동정치로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세계화가 양극화를 악화시키는 것은 아니며, 통상정책은 자유무역주의로 가는 게 옳다”며 “다만 그 과정에서 손해 보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이익계층이 손해계층을 지원하면 되고, 이는 곧 국가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지 역사흐름을 거꾸로 돌릴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최장집 교수의 ‘자유주의론’ 공방도 이어졌다. 최 교수는 “민주화 과정에서 서구와 달리 자유주의 전통이 약하다는 데는 동의한다”면서도 “자유주의의 핵심은 ‘사적소유’이고, 여기서 노동력의 대가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결국, 노동이 제 가치를 인정받고 노동하는 집단이 정책결정과정에서 평등하게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고, 또 정당이 그것을 대변하는 구조가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며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는 정당구조가 그렇게 형성, 발전돼 오지 못한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대타협, 가능한가

양극화 진단과 해법은 각각 차이가 있었지만 3명의 발제자 모두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한 방안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언급했다.

이정우 교수는 “한국의 노사관계나 대화의 문화가 (이미 사회협약이 성공했던) 80년 전의 유럽에도 못 미친다고 보는 건 지나친 자기비하”라며 “머지않은 장래에 민노총을 포함한 완전한 사회협약에 도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전망했다. 이 교수는 “최근 대통령이 임기 절반 동안 가장 안타까운 것이 지역구도 극복과 노사정 대타협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며 “그 뒤에 연정 발언까지 놓고 볼 때 관심도, 애착도 깊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장집 교수는 “현 참여정부에게 노동은 자유경쟁시장에서 기여하는 생산요소, 시장으로의 진입과 퇴출이 자유롭게 허용돼야 할 생산요소로 이해되고 있다”며 “이같은 노동배제적 정책은 사회의 계층화와 중앙과 정점으로의 격렬한 집중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기 때문에 입시경쟁의 치열함, 즉 엘리트에 대한 사회적 수요구조, 이를 재생산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최 교수는 “대기업노조가 심각한 도덕적 문제와 11%의 조직률에서 나타나듯 대표성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영역에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과 경제발전이 이들 때문에 장애가 된다는 건 수준이 다른 문제”라며 “노조의 약화와 와해가 진정 민주정부와 경제발전과 기업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되물었다. 최 교수는 ‘사회적 대타협’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노동에 대한 파트너십이 인정되지 않고 노동이 사회적 시민권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의 협약은 운동의 기반 자체를 약화·해체하는 효과를 갖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대화모임 참여자인 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이사장은 “노동이 사회발전의 주요축임에도 단지 한 부문으로 전락한 느낌”이라며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말했던 정부가 취임 6개월도 안 돼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선회하면서 한쪽으론 계속 양극화 해소 위한 대타협을 말하는데, 노동에 일방 양보를 요구하는 대타협은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편, 박세일 교수는 “(노동을 포함한) 사회협약이 잘 돼야 한다”면서도 “일례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가 통일세를 거두자는 사회협약을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유도하는 데 기여하느냐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사회협약이 자유무역 등 성장정책에 누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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