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리자는 운동이건만 운동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과로에 스트레스에, 그리고 조직사업의 ‘필수’라고 여겨지는 술까지. 때문에 몇몇 조직에서는 장기근속자를 대상으로 안식휴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휴가를 보낸 공공연맹 이상훈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이 안식휴가 일기를 <매일노동뉴스(레이버투데이)>에 보내왔다. 매주 화요일,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나는 어려서부터 먹성이 좋았다. 별다르게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다. 그리고 조상 덕인지 아니면 내 후천적 노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술도 곧잘 먹었다. 96년 스물일곱살 때, 나는 서울지하철노조에서 상근자로 일했다. 노조 사무실은 1호선과 2호선 일부가 들어오는 군자기지 안에 있었고, 현장기지이기 때문에 후생관에는 목욕탕과 구내식당, 이발소까지 있었다.

나에게 군자기지 후생관은 천국이었다. 끼니 때우고 돌아서 눈감으면 또다시 허기를 느끼던 때에 1,300원짜리 백반과 500원짜리 라면은 더없는 친구였다. 게다가 24시간 365일 하루도 쉼 없이 돌아가는 지하철 현장의 조합원들과 밤낮으로 나누는 소주 한잔은 노동조합에서 상근하는 나에겐 현장견학과도 같았다.

그렇게 사람을 알고 일을 배우며 지내던 96년 6월 어느 날, 공공부문 5사 공동투쟁 결의대회가 열리던 대학로에서 나는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연행되었고, 조직사건으로 구속되었다. 2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수원교도소로 이감되어 징역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내가 수원교도소로 이감 뜬 날 바로 새벽 6시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되었고, 수원교도소에 다른 조직사건으로 먼저 들어왔던 선배 양심수들은 날치기 통과를 규탄하는 단식투쟁에 들어가자고 했다. 물론 나도 흔쾌히 찬성하며 아무런 준비 없는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재판받던 5개월 동안 거의 매일 마아가린에 밥 비벼먹고, 라면 찬물에 불려 뿔면(교도소판 쫄면) 해 먹고, 라면스프와 참기름 넣고 주먹김밥 만들어 먹던 나에게 수원교도소에서 맞닥뜨린 단식투쟁은, 마치 학창시절에 남들 중간고사 준비하느라 정신없는데 나만 딴 학교로 전학 간다며 탱자탱자 놀다가, 막상 전학가보니 바로 내일 아침으로 들이닥친 중간고사와 똑같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된 단식투쟁은 8일 동안 진행했고, 생전 처음해본 단식인지라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막막한 나에게 선배 양심수 한분은 2권의 책을 권해 주셨다. 그것은 바로 장두석 선생이 쓴 <사람을 살리는 단식>과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이었다. 7개월간 남은 징역을 살며 나는 교도소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책에 적힌 대로 했다. 1주일 단식을 기준으로 준비식 2주, 회복식 3주. 그렇게 남은 징역을 보냈다.


약력
1969년 출생
1997년 전국민주철도지하철노조연맹 조직부장
1999년 공공연맹 조직부장
2004년 공공연맹 미조직비정규실장
현재 공공연맹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
1년 전 서울구치소에 들어갈 때 92kg이던 내 몸무게는 97년 출소하고 나니 68kg까지 무려 24kg이나 줄었다(참고로 내 키는 182cm 정도다). 정말 발등부터 머리까지 가벼워졌다. 서너번은 쉬어야 올라가던 관악산 연주암을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올라다녔다.

99년까지 그럭저럭 75kg 정도를 넘나들던 몸무게는, 99년 통합 공공연맹에서 일하면서 차츰차츰 늘어나 급기야 2005년 장기근속휴가를 앞두고는 96kg까지 불어났다. 몸무게만 는 게 아니라 체력도 떨어지고 몸 이곳저곳 고장 나기 시작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미조직비정규사업을 7년 동안 맡으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주말이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지방출장, 야간열차 아니면 심야우등버스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끼니 놓치고 폭식하고 잠 제대로 못 자다보니 몸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미조직비정규사업이라는 것이 회식을 하더라도 남들 2차 끝나고 집에 갈 시간쯤인 11시는 넘겨야 비로소 밥자리든 술자리든 시작되기 마련이다. 간단히 먹으면 새벽 1시, 토론이 길어지거나, 술자리가 길어지면 아침까지 가기 일쑤였다. 미조직비정규 동지들과 노조를 만들고 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은 현장의 동지들만큼 힘들지는 않겠지만 연맹에서 일하는 나로서도 무척 고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다. 만날 때마다 새롭고 하루 지나면 넓어지는 미조직비정규영역이 공공부문인 것 같아 더욱 그랬다. 조직사업을 하면서 기뻐서 한잔, 괴로워서 한잔, 열 받아서 한잔, 그렇게 한잔한잔 하다보니 몸은 자연스레 망가져 갔던 것이다.

올 2월 경찰고용직공무원노조 투쟁을 맡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결심에 장기근속휴가를 신청했고 3월1일부터 6개월간 휴가에 들어갔다. 경찰고용직 동지들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연맹에서 나와 함께 투쟁을 지원하던 동지들이 있었기에 휴가를 갈 수 있었다.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한의사로 일하는 고향친구를 찾아갔다. 내 생활과 하던 일, 몸 상태와 장기근속휴가를 가게 된 이유 따위를 털어놓자, 한의사 친구는 나에게 “주둥이로 망친 몸뚱이니까 주둥이를 잘 다스려야 혀”라며 몇 가지 처방을 일러주었다.

<처방전 내용>
- 단식을 통해 그동안 못된 음식들에 익숙해진 입맛을 끊을 것
- 2개월 이상의 생채식을 통해 피를 맑게 하고 장기의 기력을 회복할 것
- 체력, 근력, 유연성이 바닥인 몸 상태에 맞게 걷기운동으로 전체적인 체력을 회복할 것

이렇게 처방전을 써주며 친구는 한마디 덧붙였다. “자연에서 멀어지면 병에 가까워진다. 자연에 가까워지려면 입으로부터 생기는 욕심을 버려한 한다”고 말이다.

노동운동하는 놈에게 일상생활에서 자연을 가까이 하는 길은 결국 먹거리를 조절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라는 친구의 충고였다.

한의사 친구의 충고대로 우선 걷기부터 시작했다. 동네 솔밭공원을 땀나도록 걷고,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을 헥헥거리면서도 이틀이 멀다고 다녔다. 5살짜리 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집에서 하는 단식은 나에겐 너무 유혹이 많았다. 인터넷을 뒤져 대전에 있는 저렴한 단식원을 찾아냈고 4월초부터 12일간 생수단식을 진행했다. 단식원을 퇴원하는 날 원장 선생이 나에게 말했다. “단식으로 살 뺄 생각은 마세요. 살은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으로 빼는 거지 단식으로 살 빼는 건 욕심이자 몸을 오히려 망치는 겁니다.”

그렇다. 내 생각에는 살 빼는 것도 노동이다. 스스로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는 체중감량에도 적용될 수 밖에 없다.

단식원을 나온 후 새벽요가를 배우면서 요가수련생들과 생채식모임을 만들어 60일간의 생채식을 감행했다. 아침엔 감잎차와 사과 한 개, 점심과 저녁에는 각종 채소의 잎사귀. 줄기, 뿌리 그리고 미역, 다시마와 같은 해초를 이용해서 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식으로 두부 반모를 끼니 때마다 먹었다(생채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장두석 선생의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곤 매일 걸었다. 우이동 집에서 4호선 수유역까지 걸었고, 창동역 이마트에서 장 보고나서도 집까지 걸었다. 찻길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동네 부동산에 있는 지도를 보며 골목길, 샛길을 익혔다. 처음엔 30분만 걸어도 지치던 몸이 한달이 지나면서 2시간 이상을 걸어도 크게 지치질 않았다.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걸을 때 저기까지 어떻게 걷나 하던 거리를 이젠 동네 골목길처럼 걸어다닌다.

그때부터 더 멀리 걸기 시작했다. 인사동이나 영등포에서 약속이 있을 때는 찻길을 피하고 운동량을 늘리기 위해 북한산 능선을 넘어 시내로 갔다. 막걸리라도 몇 잔 먹은 날은 새벽이 될 때까지 걸어서 우이동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되도록 지갑 없이 걸었다.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탈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지갑을 아예 집에 두고 나가는 날도 많았다.

물론 휴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휴가 때처럼 장거리를 걸을 순 없겠지만 최소한 출퇴근할 때만큼은 지하철역까지 걸어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지금도 우이동에서 수유역까지 빠른 걸음으로 40분을 걸어다니고 있다).

나는 걸어다니면서 고무바퀴와 쇠바퀴를 타면서는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듣고 보았다. 두 손 들고 황단보도를 건너는 노오란색 아이들과 재래시장에서 구성진 목소리로 흥정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 사람 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사람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걸어 다니면서 서로 서로 정한 약속을 수없이 어기는 장면을 보았다. 버스나 택시를 타면서 서둘러가려는 욕심에 신호를 어기고 차선을 어기고 앞질러가는 모습을 보았고, 빨간불 들어온 횡단보도를 뛰어가는 사람들도 보았다. 빨라야 5분, 아니 3분인데 말이다.

최소한 출퇴근이라도 걸어서 하려면 최소한 30분 이상은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야 걷을 수 있다. 30분 이상 부지런하면 아마도 생활도 바뀔 것이다. 왜냐, 항상 미리 준비해야 하니까. 아마도 그러면 3분 빨리 가려는 욕심은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걷는 것은 심신에 좋다. 직접 걸어보니 알겠다. 활동하는 우리 동지들도 틈만 나면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걷어보자. 몸이 건강해야 활동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딨을까?

공공연맹 장기근속휴가제도
나는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맹에서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99년 3개 연맹(민철노련, 공익노련, 구 공공연맹)이 통합 공공연맹을 만들 때부터 상근자로 일했으니 공공연맹에서만 7년째 일하고 있다. 그 전에 일하던 민철노련과 서울지하철노조 기간까지 합친다면 10년 정도 일한 셈이다.


우리 연맹은 지난 2003년부터 사무처 상근자들을 대상으로 장기근속휴가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근속년수 7년마다 6개월의 휴가를 주는 제도다. 처음엔 10년에 1년의 휴가를 실시했지만 장기근속 근무자가 많다보니 10년이라는 기간은 너무 길었다. 우스개 소리로 “막내는 정년이 되어도 휴가를 못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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