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수 전국공무원 노조 법률지원 부팀장의 반론, “아무리 포장해도 악법은 악법”<본지 9월21일자>이라는 칼럼을 재미있게 읽었다. 빼어난 문체와 정연한 논리전개가 어우러진 한 편의 명문이다. 현행 공무원노조특별법은 악법인 만큼 전국공무원노조가 이 법에 의해 합법성을 얻는 것은 ‘낭떠러지로 연결된 길’이라는 게 요지인 듯하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접근하다보니 인신공격성으로 흐른다든가 비판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나무가 아닌 숲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겠다.

합법화 거부까지 해야 할 악법?

박 부팀장과 인식을 달리하는 부분은 현행 공무원노조법을 어떻게 볼 것이며 이에 따른 노조의 전략을 어떻게 짜는 게 바람직할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노동법이 노조의 일방적인 요구를 담을 수만은 없다면 노조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을 결의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1987년 이래 ‘노동법 개정투쟁의 주역’이었던 ‘민주노조’조차 일찍이 가지 않았던 길, 즉 합법화 거부로까지 나아갈 만큼 악법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다 자칫 공무원노조의 투쟁이 세숫대야에 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지나 않을까 우려가 들기도 한다.

박 부팀장의 지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단결권의 문제이다. 공무원을 직급으로 편 갈라 노조가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사의 자유가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더라도 현행법이 내세울 건 별로 없어 보인다(이는 이미 필자가 누차에 걸쳐 지적한 바이다). 그러나 단체교섭권에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에서 박 부팀장은 견강부회를 서슴지 않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노조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령 노조는 교섭창구를 단일화 해야 하지만 단일화 방법은 박 부팀장이 예로 들고 있듯 전교조 방식의 비례대표제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만일 다수대표제가 채택된다면 전국공무원노조로서는 배타적인 교섭권을 보장받을 수 있느니만큼 오히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인 것은 아닐까? 이 방식은 비용이 많이 들 수는 있으나 교섭구조의 안정성이나 노조의 난립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이는 시행령의 문제이나 공무원노조는 노조법 비판에 바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불관언인 듯하다).

두번째로 박 부팀장은 교섭의 대상이 지나치게 협소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원칙적으로 근로조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사항은 공무원노조가 아니라 일반노조들에게도 교섭사항이 되지 못한다. 교섭대상 여부를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논란들이 노동운동의 이름으로 있어 왔는지를 박 부팀장이 모를 리 없다.

구체적으로 공무원노조의 교섭대상을 법률로 명시하고 있는 일본이나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정책결정사항과 관리운영사항을 노조와 교섭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사실 교섭대상 여부는 노사분규의 사전적인 예방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처럼 노동위원회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또한 노동자의 참가가 중요하다면 프랑스에서 보이듯 ‘국가공무원 최고회의’와 같은 사회적 대화기구를 구성하는 방안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박 부팀장은 예산이나 법령·조례에 관한 부분은 단체협약으로서의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이를 단체교섭 무용론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럼 ‘사설조직’인 노동조합이 예산이나 법령·조례까지 결정할 수 있어야 그게 노동기본권 보장이고 민주주의인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나 지방의회뿐이라는 사실을 공무원노조의 간부가 정말 모를까? 오히려 교섭결과를 어떻게 법령이나 예산·조례로 반영할지에 관해 정부의 책임을 단체협약에 분명히 적시하는 방안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을까?

여타의 단체행동, 판례로 확립돼야 할 지점

마지막으로는 단체행동권이다. 공무원노조의 단체행동권 문제는 국제노동기구(ILO)도 그냥 지나가듯이 이론적 정합성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공익과 파업권의 모순 속에서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편들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외국의 사례에서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제한적이나마 보장하지만 미국(연방)이나 독일, 일본은 일절 허용하지 않고 있다. 더욱 중요하게 공무원의 단체행동권 여부는 공무원 노사관계의 특수성에 덧붙여 노동운동 일반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국회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 대해 국민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공무원노조도 지난해의 경험으로 알고 있을 터이다.

박 부팀장은 근무시간 중에 집단적으로 조끼(투쟁복)를 입는 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심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그런가? 필자가 알기로는 이는 법이 시행될 경우 판례로 확립되어야 할 부분일 뿐 사전적으로 어떤 결정이 내려진 바는 없다. 다시 말해 그것이 복무규정에 위반될 수는 있겠지만 명백히 쟁의행위라고 법률적으로 판단된 부분은 없는 것이다. 행정수요자의 입장에서 담당공무원이 조끼를 입고 근무하는 모습이 어떻게 비쳐질지는 다른 차원에서 공무원노조가 전술적으로 판단할 부분일 것이다.

더욱이 단체행동 또는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일’이 금지된다고 해서 ‘갈등의 표현’(expression of conflict)까지 포괄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창의적인 (사실상의) 쟁의행위방식을 발굴하려는 노력은 쟁의행위가 허용된 일반노조에게도 지속적인 고민사항이기도 하다. 역시 단체행동이 금지된 교직원노조의 다양한 투쟁사례가 있기도 하다.

고치고 보완할 기회마저 박탈하진 말자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곡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공무원노조법에는 분명 잘못된 점도 있지만 잘된 점도 많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리고 설령 잘못된 점의 무게가 크다고 느끼더라도 전면적인 거부로 나서는 게 과연 최선일까라고 느끼기도 한다. 단단한 박달나무가 아니라 곧고 굳게 자라며 대쪽같은 원칙을 지키나 바람에 흔들릴 줄도 아는 대나무의 유연성을 말하는 것이다.

모자라는 부분은 한편으로는 시행령의 제정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메워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체교섭의 과정에서 보완해나가는 노력을 놓치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나아가 법의 개정이나 폐지가 요구된다면 그 근거를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의 마음속에 축적시켜 나가라는 지적을 하고 싶었다.

노동운동가에게는 때로는 투쟁이 쉬운 방법일 수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때로는 ‘맛이 가버린 사람’이라는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나 활동가의 요구에 편승한 무소신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E. H. 카아는 일찍이 새내기 대학생의 필독서가 된 그의 저서에서 ‘지체된 성공’(delayed achievemen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오늘의 명백한 실패도 내일의 성공에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시대에 앞서 태어나듯이 말이다. 그러나 신의 영감을 받지 못한 예언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시대정신을 담지 못한다면 ‘과감한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노동운동에서 투쟁이 곧 변혁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자기들만의 리그’에 갇혀 제 팔 제가 흔들고 마는 식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팔을 흔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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