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87년 민주노조운동체체’의 최후의 불꽃 96~97 총파업이 정리해고 수용의 잔재만을 남긴 순간, 자본은 어김없이 개별사업장에 정리해고의 직격탄을 퍼부었다. 금속산업의 기아, 현대, 만도… 등, 처절한 투쟁과 뒷걸음이 이어지고 “현장에선 강성, 집행부 하면 온건”이 된다는 상식마저 싹트고 있었다.

냉혹한 추위

그러나 구조조정의 겨울은 끝난 게 아니었다. 대우차에 쏟아진 ‘최대규모의 정리해고’라는 더 참혹한 한파는 분노의 열기로 맞섰지만 정작 가슴깊이 찔러온 것은 ‘내부연대의 파괴’였다. 해고자 1,765명 모두 작업장에서 일할 때 형님동생이었건만, ‘짤린 자’들의 처절한 항거에도 공장 담 안의 ‘남은 자’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규직 내부연대마저 철저히 부숴지고 있었다.

난 흔들리며 인간의 본질을 의심했다. 그러나 특별히 대우차 노동자들이 해고된 동료를 외면하는 철면피들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아니다. 대우재벌과 대우노동자 간 전투를 이미 벗어나 '국제통화기금을 앞세운 초국적 자본-세계최대자동차기업GM-김대중 정부-채권단- 채권단의 하수인 경영자' 등 거대한 자본의 연합전선 앞에 그야말로 맨몸으로 선 대우차 노동자가 대결하는 힘 관계 속에서 화염병이 부평거리를 날아다니고 경찰차를 불태우는 전쟁을 치를지라도 매각과 정리해고를 막을 수 없다는 현실 판단, ‘나섰다가는 화를 당할 것’이라는 벼랑에 몰린 생존의 본능이 있었다.

강요된 생존의 법칙

고도성장의 성과분배를 크게 넘지 못하던 노조운동은 갑자기 닥쳐온 환란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광대한 벌판에 아무런 무기 없이 내팽개쳐졌다. 한파가 휩쓸고 간 자리엔 ‘생존게임’만이 남았다는 느낌뿐, ‘투쟁과 침묵’ 사이에 절대 벽은 없었다. 정리해고의 절벽에 맞선 구조조정투쟁이든 혹은 짤리지 않기 위한 침묵이든 ‘생존’이라는 동일한 목적 속에 선택되는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계급투쟁에서 후퇴한 노동자에겐 철저히 신자유주의적 생존법칙이 강요되었고 이 법칙은 구조조정의 직격탄을 맞은 대공장에게 더 혹독하게 퍼지고 있었다. 정규직 고용을 위해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생각하는 것은 이 법칙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바뀐 상황에서 무엇을 했어야 할까? 또 ‘전투 앞으로’를 외치는 것은 무능한 지휘관의 의지일 뿐, 필요한 것은 전열 재정비에 맞는 대중운동 이었다. 하지만 수년간 반복된 무력한 총파업은 오히려 연대투쟁을 통한 ‘희망찾기’ 보다는 개별적 생존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것이 아닐까?

떠오른 새 희망 ?

바로 이즈음 새로운 희망으로 산별노조가 제시되었다. 자본과 정권은 단위기업 수준이 아니라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공격해오는데 우린 기껏 단위노조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다는 반성 속에서 새로운 무기는 산별노조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수년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산별노조를 둘러싼 논의는 무성하게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구획논쟁, 10장2조 논쟁, 소산별·대산별 논쟁, 지역산별과 전국민주노조 따위의 주장들이 더 강화된다. 모든 생각이 산별이라는 틀 안으로 갇혀 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물론 기업을 넘어, 산업 차원에서 뭉쳐야 하고 국가 차원은 물론 국제적 연대의 벽도 튼튼히 쌓아야 한다. 늘어나는 국내 기업들의 해외공장들까지 포함한 국제적 노조를 만드는 것은 환상이라고 해도 최소한 ‘동북아 중심국가’를 외치는 정권에 맞서려면 우리 또한 ‘동북아 중심노조’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현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지만 문제는 이런 그림 그리기가 아니다.

깊어만 가는 내 안의 의문들

2001년, 조직력이 살아 있는 중소사업장을 중심으로 금속 소산별이 탄생했고 대공장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공장의 이기주의 때문’이라는 비판들이 이어지고 연대의 당위를 소리 높여 외치지만 기업의 벽은 고사하고 공장 안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높은 차단벽이 쌓여 왔다.

산별노조를 만들자고 외쳐온 동안 ‘골리앗 전사’ 현대중공업노조는 ‘계급의 배신자’로 제명되었다. 불과 1년 사이에 똑같이 ‘류기혁 동지’를 열사라 칭하기를 거부한 현대차 집행부에 비판이 쏟아진다. 산별노조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 멀어져 가는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처음은 아니지만 금속노조에서 탈퇴하는 조직이 생겼다. INI스틸 포항지회의 탈퇴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1사2노조 상황에서 교섭권도 가질 수 없는 포항지회의 고민을 ‘산별 반대한 놈들’이라는 배신의 낙인으로 덮어버리면 해결될까? 아직도 기업별 노조의 관성이 높다며 아예 기업지회를 없애고 현장위원제도라는 조직형태를 들이대면 더이상 배반자들은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

위로부터 쏟아지는 민주노동당-총연맹-산별연맹-금속노조의 지침들만 수행하려 해도 죽을 지경이라며 피로를 호소하는 현장의 간부들에게 ‘그것은 아직 기업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며 ‘한다면 한다’는 정신을 강조하면 해결될까? 2006년 3월에 민주노총 차원에서 대대적인 산별노조로 전환하자고 한다. 정말 가능한 그림일까?

5년 전부터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면 큰일 날 것이라고 했고 지금은 ‘2007년’이 단 1년 남았다. 조급함에 “산별노조를 위한 마지막 전면전”의 목소리가 높아간다. 하지만 목소리가 높을수록 불안하기만 하다.

끝나지 않은 겨울

초기업단위 노조를 만들자는 것에 백번 동의한다. 그러나 “대체 상급단체는 왜 대공장 눈치만 보냐”는 비판 속에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계급적 배신행위에 속수무책인데 무슨 계급적 산별이냐”는 현장조합원의 반론에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돈 잔치로 정규직을 달래고 비정규직 문제는 외면할 것이라는 현대차 임단협 잠정합의를 앞둔 절박한 상황에서 현장 활동가는 ‘비정규직 외면하면 배부른 돼지 된다’는 몸 벽보를 하고 식당 앞에 섰다고 했다. 그 애틋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리 없다. 철저한 계급 간의 힘에 의해 생존의 법칙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윤리적 당위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현대차에서 무너지고 있는 계급연대의 현실을 두고 ‘누가 되든 마찬가지’라는 합리화와 ‘000위원장 ××놈’이라는 욕설이 엇갈린다. 욕을 하라고 하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퍼부어도 시원치 않다. 그러나 남는 것은 허무일 뿐이다.

독재와 탄압에 맞서 과감히 감옥행을 결의했던 민주노조의 투사들이 세계화시대의 생존논리와 소비주의, 돈의 유혹에는 아무런 싸울 무기도 철학도 갖추지 못한 채 벌거숭이임이 철저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온 힘을 쏟을 곳은 어디일까? 신자유주의 생존논리를 강요당하는 노동자들 속에 아직 피어나지 못한 갈망을 찾아내는 것, 연대가 필요하지만 갈등이 대신하고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노조 간의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과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닐까?

민주노조를 목표로 해서가 아니라 억압과 수탈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폭발했으며 그 저항이 담긴 그릇이 바로 민주노조다. 조직형태 이전에 사업장 내부, 지역, 산업과 업종, 전국 차원에서 다양한 대중적 연대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상황에서 낡아버린 관념 속의 그림이 아닌 대중적 역동성이 숨쉬는 활동들을 창조하는데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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