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올 한해 기업경영의 모토로 윤리경영을 채택했다. 윤리라운드 등 기업들에게 윤리경영은 어느새 취사선택이 아닌 생존을 결정짓는 필수선택이 됐기 때문이다. 전경련 내에는 윤리경영팀도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전경련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 문제의 해소를 위해 협력위원회를 꾸리고 상생을 약속했다. 그의 일환으로 불공정 하도급거래의 척결을 다짐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처음으로 대-중소기업협력대상 시상식을 열고 삼성전자에 영광의 대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재계의 이런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현장 곳곳에는 납품단가 인하요구 등 대기업들의 횡포 때문에 못살겠다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오히려 상당수 중소기업 사장들은 “대기업의 윤리경영은 홍보용 말뿐”이라며 재계의 노력에 대해 불신을 넘어 야유와 조롱을 보내고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되며 삼성SDS와 1년째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조성구 얼라이언스시스템 대표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조 대표는 이해할 수 없는 검찰 수사와 주류 언론사들의 냉대, ‘삼성에 무모하게 맞선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들을 1년 넘도록 견뎌왔다.

그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정리해 <매일노동뉴스>에 보내왔다. 그의 글 속에는 납품단가 인하 요구, 그뒤의 회유와 협박 등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거래 전형이 백과사전처럼 수록돼 있다. 우수한 품질로 피땀 흘려 일군 한 벤처기업이 대기업의 횡포에 어떻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를 조 대표의 생생한 증언을 담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기업들이 수도 없이 외쳐 온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이 얼마나 허구이고, 이 땅에서 중소기업으로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조금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편집자주>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정말 하루하루가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삼성이라는 거대조직과 싸우면서 한 기업의 부당한 횡포만이 아닌, 우리사회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갖가지 모순과 대면해야만 했다. 삼성 앞에서는 법도 공정치 않았다. 언론도 알아서 입을 다물었고 업계 동료들조차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이런 구조적 모순 속에서 피땀 흘려 어렵사리 만들어낸 정말 좋은 제품, 자식 같은 우리 제품은 서서히 죽어가야만 했다. 무엇보다 이 점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회사를 운영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지난 1년을 떠올리면 이렇듯 가슴 속 응어리와 상처가 금방이라도 도드라져 나올 것만 같다.

삼성의 횡포, 그 이상의 것들

내가 처음 금융 소프트웨어에 눈을 뜬 건 1990년 한국컴퓨터에 입사하면서부터다. 마포구 대흥동에 위치한 한국컴퓨터는 금융단말기 전문업체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첫 발을 내디딘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영업대표까지 맡으면서 6년 동안 금융계 사람들과 얼굴을 익혔고 금융시스템 및 이미징솔루션에 대해 기술도 배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샐러리맨의 희망인 창업을 꿈꿨고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6개월 전인 1997년 5월, 드디어 블루버드코리아라는 작은 회사를 세웠다.

초기 사업비는 우리 회사의 미래를 밝게 보고 믿어준 장은창투사의 전폭적인 투자에 크게 힘입었다. 그리고 미리 구상했던 사업계획들을 하나하나 실천으로 옮겨나갔다. 사업 초기에는 미국 소프트웨어 제품의 한국총판 역할에 머물렀지만 언제까지고 유통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제품, 우리회사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그래야 사업하는 보람도 있다.

우선 나는 사무자동화의 근간이 되는 페이퍼리스(Paperless) 사업부문에 최적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우수한 인력 확보가 필수적이어서 미국 블루버드시스템 엔지니어들과 2000년 12월 샌디에이고에 현지 연구법인을 설립했다. 그리고 미국 직원들에게는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현지 경쟁사에 비해서도 섭섭지 않은 대우를 해줬다. 국내 법인에서도 인도의 우수인력을 영입하는 등 뛰어난 제품 개발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많은 벤처회사들이 그렇듯이 나는 직원들에게 출퇴근 시간이나 고정화된 어떤 규율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직원들의 창의적인 생각과 활동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곤하면 아무 때고 집에서 쉬고 컨디션이 최상일 때 일을 하라고 독려했다. 재택근무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재택근무를 하게 했다.


천신만고 끝에 신제품 출시…개발비만 70억원

이러한 능률 중심의 경영이 직원들에게는 오히려 큰 자극이 됐는지 회사일에 내 일 마냥 적극적이었다. 스스로 며칠밤을 새는 열성적인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금요일까지 한국에서 일하고 다시 주말 비행기를 타고 샌디에이고로 날아가 일을 처리하며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그런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XTORM’이란 이미징솔루션 제품을 개발했다. 개발비만 무려 70억원 가까이 들었다.

최초 제품은 국민은행의 수납장표 전산화 업무에 적용돼 은행 전산실 직원으로부터 제품이 우수하고 성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러한 평가는 차츰차츰 다른 은행들에게도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회사 설립 후 처음으로 외산 제품과 성능평가시험(BMT)까지 치르게 되었다.

그 첫 무대는 조흥은행이었다. 경쟁사 제품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회사로서 20년 이상의 기술축적이 돼 있던 회사였다. 작은 규모의 중소기업인 우리로선 성능평가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지만 제품의 우수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평가 결과 우리 손으로 자체 개발한 ‘XTORM’ 제품이 경쟁사 제품에 비해 몇배나 빠른 처리능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사용하기 쉽고 유지·보수가 편한 점 등도 장점으로 부각돼 조흥은행에 당당히 선택됐다.

사업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뿌듯함과 보람감에 회사의 임직원 모두는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때부터 주위의 부러움과 인기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조흥은행의 평가시험 뿐만 아니라 외환은행, 대구은행, 교보생명, LG텔레콤 등의 테스트에서도 결과는 월등히 우수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 때는 국내은행권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이 90%를 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금융권에도 진출해 5개 은행의 고객도 확보했다. 그러나 이같은 제품의 우수성과 높은 시장점유율에도 불구하고, 2002년 4월 삼성SDS와 '악연'으로 승승장구하던 회사의 기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승승장구…삼성 만나고부터 추락

시스템통합(SI) 업계는 건설업계와 마찬가지로 대-중소기업 간 하도급관계가 보편화 돼 있다. 삼성SDS, LGCNS 같은 대기업이 금융기관인 발주자로부터 프로젝트를 낙찰받으면 우리같은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형태다.

단지 건설사들은 아파트를 공급하지만 우리는 소프트웨어를 공급한다. 때문에 프로젝트의 입찰가격은 우리 제품을 쓰는 사용자 수에 따라 산정된다.

그런데 2002년 우리은행의 이미징/워크플로우 프로젝트에 삼성SDS는 입찰조건이었던 ‘무제한 사용자 기준’을 ‘300명 사용자 기준’이라고 우릴 속이고 입찰에 참가해 낙찰을 받았다. 삼성SDS는 우리은행과 ‘무제한 기준’으로 낙찰가를 높여 계약해 놓고 우리에게는 ‘300명 기준’이라고 속인 것이다. 그뒤는 뻔했다. 입찰이 끝난 뒤 삼성SDS는 입찰 전 제시가격보다 더 많은 할인을 요구했고, ‘300명 사용자 조건’을 ‘무제한 사용자 조건’으로 공급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피땀 흘려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자해 개발한 'XTORM' 제품을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공급할 수는 없었다. 삼성SDS측에 곤란함을 표시하자 삼성SDS는 은행측에 협상을 시도해 우리 제품을 경쟁사 외산 제품으로 교체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입찰의 핵심 소프트웨어로서 교체할 수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이러한 파렴치한 행각을 우리은행의 기술담당 직원으로부터 알게 됐고, 삼성SDS측에 강력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삼성SDS와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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