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어떤 방송프로에서 명절에 듣기 싫은 말들을 조사했다. ‘국수 언제 먹여 줄 거냐’가 단연 1위였고 그 외에도 ‘공부는 잘하니?’ ‘취직은 언제 할 거냐’는 등의 언사들이 열거되었다.

추석 전 날 투쟁사업장 방문길에 여성동지들과 나눈 이야기 역시 이와 비슷했다. 결혼 전에는 왜 결혼을 안 하느냐, 언제 할 거냐 질문에 시달리다 시집가고 나서는 애가 없으면 왜 없는지, 애가 있으면 둘째는 언제 낳을 건지 물어보는데 정말 괴롭다고들 했다.

여성들이 그 좋은 명절을 앞두고 두통에 소화불량을 앓는 이유는 뭘까. 가는 길이 멀고 힘들어서이기도 하고, 내내 부엌일을 해야 하는 까닭도 있고, 친정이 아니라 시집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더군다나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살던 이들이 만나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 역시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가.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여성이 명절을 앞두고 병을 앓는 이유

평생을 집안일에, 직장생활에, 거친 운동판의 궂은 일까지 다하는 여성들에게 일이 대수겠는가? 까다로운 직장상사도 잘 모시는 캐리어우먼들이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조직사업도 척척 하는 활동가들인데 친척들 만나는 일이 뭐 그리 생소하고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아니다. 뭔가 흔쾌하지가 않고 피곤하다. 여성들이 왜 다르게 느끼는지 남성들은 잘 모른다. 평소에 논리적이고, 진보적이고, 여성친화적인 동지들조차 제사와 명절 문화 앞에선 갑자기 외계인이 된다.

몇 년 전 평등적 명절문화를 위해 노조 지침을 작성해본 적이 있다. 부엌일을 같이한다거나, 오후에는 처가를 방문한다거나, 거리가 멀 때에는 추석과 설을 나누어 처가와 친가를 간다거나, 차례용 음식을 현대화하여 손이 많이 가는 나물이나 지짐을 줄이고 애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대신한다거나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안을 만들었었다. 그런데 정작 차례나 제사라는 의식문화 자체에 대해 포문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60년대초 제주도에 머물며 제사문화를 연구했다. 생산의 주체가 절대적 힘과 권위를 갖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가 이 지방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연구 결과, 생산활동의 주책임자가 아니었던 제주남성들은 제사라는 의식을 독점함으로서, 그리고 그 엄숙한 제사 의식에 여성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서 그들만의 세계를 세습해 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변치 않는 미풍양속(?) 누구의 것인가

물론 한 세대 이전의 풍속을 두고 현재를 설명하는 일은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러한 의식문화에 저항하는 반면 남성들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담당자가 되고자 한다. 이런 차이가 여성들이 명절의 즐거움을 만끽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고, 진보 남성들에 대해 아쉬움을 갖게 한다. 에이프런은 두르고 프라이펜을 뒤집는 이벤트를 할지언정 어떤 남성이 ‘나는 제사가 싫다’고 외치겠는가? 명절기간 중 친가와 처가 방문회수를 밝힐 만큼 평등적이거나, 처가의 명절과 차례를 책임진다는 남성이 어디 있는가.

제사와 차례와 명절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들에겐 그게 그거다. 차이가 있다 해도 본질적 의미에선 별반 큰 차이가 없고, 스트레스로 와 닿는 점에선 똑같다. 부계혈통의 존중, 충효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가부장제의 강화, 그 과정에서 여성의 주변화, 소외, 그리고 노동.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에도 참으로 변화하지 않는 이 미풍양속(?)은 ‘누구의,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강화인가?

‘나 죽거든 제사는 지내지 마라’며 일찌감치 유언을 하시고, 가까이 사는 며느리보고는 명절 때라도 친정에 가보라며 등을 떠다미시는 내 친정어머니. ‘나한테 잘해라 말로하지 뭐 하러 상 차리고 절하며 은연중에 자식들에게 효를 강요하냐, 비겁하게!’라며 명쾌하게 정리하시는 친정어머니가 내 눈엔 진정한 운동가이시다. 남성들의 입에서도 그런 말들이 거침없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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