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자(?火者 )는 여공 「102번」' 인천의 노동쟁의 관련 기사를 찾느라 60년대 신문을 뒤지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화재사건이려니 생각하고 넘기려다 ‘여공 「102번」’이 눈에 걸려 신문을 열었다. 신문을 열어보니 장난이 아니다.

때는 전국 곳곳에서 4.19혁명의 불씨가 붙고 있던 60년 3월 초. 부산 ‘국제고무’에서 큰 불이 났다. 여공 한명이 담뱃불을 붙이려고 성냥불을 켰는데 불똥이 그만 고무통으로 튀어 불이 붙었다. 여공은 급하게 불을 끄려했는데 그만 고무통이 엎질러지면서 옆에 있던 시너에 옮겨 붙었다. 고무자체가 인화성이 강한데다 공장 곳곳에는 시너, 휘발유 통이 그냥 방치돼 있었다. 게다가 비상구는 잠겨 있었다. 상황은 그야말로 ‘안 봐도 비디오’.

이 화재로 조선일보는 72명이 사망했다고 하고, 연합뉴스는 62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내 이름은 ‘여공 102번’

기사를 접한 이후 사건이 내 마음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그건 사람 엄청 죽은 화재사건 자체보다도 실화자인 ‘102번 여공’ 때문이었다.

“3일 상오 현재 밝혀진 화인(火因)은 포타부 2번대에서 일하던 102번인 약 34세 가량의 여공이 … 그런데 실화자인 여공 102번의 신원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사여부조차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 1960년 3월4일자)

부산에서 고무산업이 발달한 것은 6·25전쟁 직후 피란민 등으로 풍부해진 부산지역 노동력이 산업 기반이 됐다. 신발산업에 적합한 기후조건과 일본이 생산기지를 한국으로 넘겨준 것이 중요한 배경이었다. 어려서 엄마가 신던 흰 고무신, 막내딸한테 큰 맘 먹고 사다준 ‘왕자표’ 꽃신, 오빠의 ‘범표’ 감색운동화 한 켤레 모두가 부산지역에 있는 고무공장에서 쏟아진 것이다. 그중에서도 ‘국제고무’는 일종의 사관학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나이 34세 가량의 102번 여공도 대충 6.25 전쟁 와중에 남편 잃고 남겨진 어린 자식 키우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곳 ‘국제고무’까지 흘러 들어왔나 보다.

전태일 열사의 청계천 다락방보다 더 험악한 공장에서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그 시절 숱한 ‘102번 여공’들은 ‘이름도, 성도 모른 채’ 그저 102번 여공으로 불려졌나 보다. 종점다방 미스김 언니처럼.

102번은 잡히고 사장은 잘 나가고

다행히(?) 102번 여공은 죽지 않았다. 대신 잡혔다. 그리고 구속됐다.

그러나 안전관리를 허술하게 한 부산 ‘국제고무’ 사장은 잡히지도 않았고 망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1년 뒤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를 등에 업고 날로날로 번창했다. 전두환에 밉보여 국제상사가 공중분해 되기까지. ‘근로자 안전보장 재반성의 계기’(조선일보 1960년 3월4일)로 삼자던 언론들은 이내 이 사건을 잊어버렸다. 근로자 안전보장도 여공들의 근로조건도 깡그리 잊었다.

그의 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로부터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 경제는 ‘그때 그 시절’과 비교를 불허할 만치 성장했다. 그리고 “장기집권에 독재를 좀 심하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나라 경제를 이만큼 발전시켰다”는 그 대통령의 딸은 야당 총재가 되어 있다.

여공 ‘102번’의 딸, 그 딸자식의 딸.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법정최저임금 67만원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나마 일자리가 있어 다행’이라며 깊은 시름 한숨에 날려 보내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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