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일하고 있는 공공연맹은 2006년 말 공공산별 출범을 목표로 9월 현재 (가)공공산별노조 토론(안)을 현장토론에 부치고 있는 중이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공공산별 토론안’을 작성하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기도 하고, 연맹 교육국장 업무도 맡고 있다. 자연스럽게 산별노조 건설운동과 교육사업을 연계시키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가 없다.

산별노조에 대한 의견과 주장, 인식은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굳이 공통점을 하나 찾아보라고 한다면, 현재의 기업별 노조 체제로는 더이상 안 된다는 상황인식일 터이다.

기업별 체제로 안 된다는 인식을 한국의 지배계급인 자본가집단, 또는 김대환 장관 같은 고위 행정부 관료들이 하고 있을까? 아마 아닌 듯하다. 만에 하나 하고 있다면, 과거 박정희가 만들었던 노동통제기구로서의 산별노조에 대한 향수(?)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땅 1,4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인가, 또는 한국노총까지 포함해서 160만명에 이르는 노동조합 조합원들인가? 필자가 지난 십수년 동안 연맹에서 일해 온 경험으로는 이것도 그다지 설득력 있는 진단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도대체 누구인가?

노동해방의 꿈, 실제로도 그러한가?

'의식 있는 노동자'가 정답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좁게는 단위사업장에서, 좀더 넓게는 지역사회에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리 노동자가 바라는 세상을 현재의 기업별노조 체제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다는 실천적 판단(?)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그 주인공이란 것이다.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구매하는 기본 축을 중심으로 작동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가 조직한 노동조합은 본능적으로 노동해방을 꿈꾸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도 그러한가. 노동운동이 시작된 지난 200여년 동안 왜 노동해방은 전 지구적으로는커녕, 한국 같은 한 나라에서도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노동자는 노동자이되, 그 의식은 별로 노동자 같지 않은 노동자’를 양산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필자는 한국사회의 지배계급이 공고하게 구축해 놓은 ‘제도권 교육의 체계와 내용’에서 그 비밀의 한 자락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초·중·고를 다녔고, 전두환 정권시절 대학에 적을 두었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내가 누구인지, 심지어 ‘노동자’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정규 교과과목에서 배워 본적이 전혀 없다.

반면에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취직하고, 그래서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것 같다. 실은 제도권 교육의 전 과정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이념(?)’을 체질화화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전 세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필자의 이후 세대라도 제도권 교육의 노림수와 내용은 그닥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한마디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한 회사의 종업원으로서,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회사 일 잘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의식이 거세된 대량의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름하여 제도권 교육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정규직인 나와 비정규직인 노동자는 다른 종류의 노동자이고, 우리 회사와,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좀 안됐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우리 조직화된 노동자에게 비교적 자연스럽게 퍼져 있다면, 이는 역설적이게도 지배계급의 지속적인 승리를 보장해주는 튼튼한 버팀목이 될 것이고, 노동해방의 꿈은 그만큼 허공을 헤매는 대답 없는 메아리로 되돌아 올 것이다.

계급의식 무장된 노동자, 꿈을 현실로 만드는 동력

그래서 다시 돌아가면, 자본주의 착취 구도에 저항코자 하는 노동자의 본능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다시금 노동자가 노동자의식을 갖는 일의 중요성에 눈을 돌려야한다. 24시간 탈노동자 의식화 프로그램이 작동되는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노동자 의식을 복원시켜내는 과정은 그것이 비록 단위노조 투쟁일지라도, 파업투쟁이요, 교육사업이란 것이 필자의 경험이다.

확실히 노동자는 (파업)투쟁과정에서 자신의 실체가 실은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그래서 파업투쟁을 해본 노조와 그렇지 않은 노조는 ‘우리 노조’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진행되는 연대투쟁에도 열심이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의식이 뒷받침 되는 까닭이다.

반면 노동교육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현실이다. 자본가 계급이 탈노동자의식을 확보하기 위해 쏟아붓는 어마어마한 교육, 문화, 생활 전 영역에서의 노력에 견주어 본다면, 노동조합이 투여하는 교육사업의 양과 질은 아예 비교 대상조차 되질 않는다.

웬만큼 규모 있는 연맹에 속하는 공공연맹도 교육사업 담당 3명, 연간 재정 약 4,300만원(전체 사업비 대비 약 18% 수준)에, 기획교육 외에는 체계화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때문에 단위노조 간부를 대상으로 대상별, 주제별, 시기별로 체계화된 교육을 시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고, 단위노조에서는 간부나 조합원 수련회 때 연맹에 강의 요청해서 한 두 꼭지 교육을 받는 것이 평균적인 노동조합 교육의 모습이다.

우리 노동자가 노동자의식으로 단련되는 과정의 하나로 교육사업의 목표를 설정한다면 목표달성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무안한 실정이다.

다시 산별노조로 돌아가 보자. 공공연맹이 산별노조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가 산별노조‘건설’이다. 현재의 162개 가맹노조, 10만 조합원이 산별노조로의 전환투표에 머물지 않고, 본래 산별노조를 만들려는 목적, 즉 모든 노동자가 우리 회사, 너네 회사 따지지 말고,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하지 않는 계급적 단결이 가능한 노조를 만들자는 거다.

그렇지만 산별노조가 건설된다고 하여 곧장 조합원들의 의식이 산별의식, 계급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공공연맹은 산별노조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산별노조 교육체계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연맹 내부의 토론과 준비를 더욱 세부화 시켜야겠지만, 현재까지 교육위원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소개하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의식화된 노동자 수 많을수록 꿈은 현실이 된다

첫째 산별교육의 기본방향은 노동자의 계급의식 복원을 목표로 하고, 대상은 전 조합원이다. 둘째, 간부층(현장위원 약 5,000명, 노조 중앙, 본부, 지부 상근간부 약 500~1000명)에 대해서는 종합적인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정규과정으로 이수케 하는 분위기 형성과 제도를 만든다. 셋째 교육과정의 주된 내용은, ‘노동자의 세계관 형성‘, ’산별노조 각급 단위 간부로서의 실무능력 제고‘, ’인성교육‘을 중심으로 세부 설계를 한다.

마지막으로 실은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 셈인데, 교육사업을 산별노조운동을 성공시키는 중심축의 하나로 설정한다. 다시 말해 산별노조 규약과 제규정에 교육대상의 참여를 명문화하고, 사업에서의 비중(인력과 재정 배분)을 투쟁사업에 이어 두 번째 수준으로 격상시킨다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이 정작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는 또 얼마나 현실론에 밀려 한참 뒤로 처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노동해방을 꿈꾸는 노동운동이 살아 있다면, 이 운동을 운동답게 해주는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의식화된 노동자의 수, 특히 간부의 수가 많을수록 꿈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노조라는 조직에서 앞장서서 활동하는 간부들의 소임은 노동자의 눈으로 노동해방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때, 노동계급의식으로 무장된 간부의 존재 여부가 그 노조의 활동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결국, 노동계급의식으로 무장된 튼튼한 간부층이 있고, 조합원들의 대중적 요구와 정서를 계급적 관점과 대중적 언어로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야만, 산별운동은 본래의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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