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는 자연이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쳐 준 한 해였다.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강타하더니 ‘카트리나’가 아메리카 대륙을 강타하였다. 휴가철에 닥친 쓰나미 피해는 남국의 ‘원주민’은 물론 북국의 ‘관광객’에게도 고스란히 피해를 안겨 주었다.

21세기는 계급을 넘어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위험 사회’ 또는 ‘복합 위험 사회’라고 진단했던 울리히 벡의 주장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간 대구 지하철 참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등을 통해 우리는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위험 사회의 현실을 확인한 바 있다. 위험 사회의 참사는 ‘가해자’를 확인할 수 없고 피해자도 누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 일 수 있다.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뜨겁지만

이러한 새로운 현실 속에서 피해자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뜨겁다. 쓰나미 구조 자금을 얻어 스리랑카를 방문예정인 나카무라 교수를 만났다. 공동체의 공생의 경제학을 주장했던 나카무라 교수는 자신의 연구 현장이었던 스리랑카에 구호 자금을 들고 가는 중이었다. 그가 전해준 스리랑카의 현실은 ‘구호의 경쟁터’였다. 독일의 비정부 단체는 집집마다 어선과 어망을 사서 돌리는가 하면 네덜란드의 단체는 현금을 가가호호 나누어 주고 있다.

이들의 구호의 마음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현실은 착잡하단다. 6개월이나 지나야 어장을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어선은 당장의‘ 필요’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직은 사치품이다. 당사자와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인 구호는 보낸 이의 아름다운 마음까지도 때로 왜곡해서 바라보게 만든다.

비기독교 신자가 많은 이들 지역에서 주민들은 기독교 단체의 ‘구호’를 간접 선교방식으로 오해하기도 하고 현물지원을 시장 확대를 위한 행보로 오해하기도 한단다. 나카무라 교수는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춘 구호를 위해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고 마을 단위의 협동조합을 통해 마을 주민의 결정에 따라 지원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카트리나 피해자를 위한 구호금 보내기에 우리도 팔을 걷어 붙였다. 구호액수에서 세계 제 4위국에 해당한다.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쓰나미 지원 등을 거치면서 피부색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재난’의 피해자가 되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배려가 높아지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도움을 주는 입장이 되는 것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는 것 보다 더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

1987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고학생 노동자( 건설 노동자, 광부 노동자) 등으로 지구촌 사람들과 만났다. 당시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 근면과 성실’이었다. 그런데 1987년 공장이 해외에 진출하기 시작하고 씀씀이가 큰 관광객이 나가고 자비 유학생의 모습으로 지구촌 가족들과 만나면서 한국인의 국제적 이미지는 많이 훼손되었다. 진출 기업이 많았던 인도네시아의 여론 조사에서 가장 싫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충격적인 여론 조사 결과가 나온 적도 있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나눔을 실천해야

우리도 세계 12위의 경제 규모에 맞는 대외원조를 담당하는 나라가 되었다. 대외원조의 규모를 높이게 될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또한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지원이 어떤 것일까라는 마음이 실어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대부분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대해 우리는 경제적 부수효과를 꼭 다는 친절한 주석을 붙인다. 지원을 받는 측에서도 단순히 지원이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 잇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20년까지 새로운 발전의 비전을 새워놓고 매진하고 있는 인도에서는 쓰나미 ‘지원’을 거부하였다. 나눔도 경쟁이 되는 시대다. 나눔의 경쟁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것은 피해자의 아픔을 내 자식의 그것으로 보는 어머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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