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 전화 받아!”

출근해서 숨도 채 돌릴 틈도 없이,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전화가 빗발쳤다. 순간, ‘에고, 또 시작되었구나. 아, 괴롭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역시나 나의 예상대로, 오늘 아침 한나라당 고조흥 의원의 군가산점제를 부활 추진 발표에 대해 여성단체들의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전화였다.

지난 6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같은 취지의 입법발의를 했고, 며칠 전 남성협의회 소속 한 여고생이 여성징병의무화를 주장하는 헌법소원을 제기하더니, 급기야 오늘은 공무원뿐 아니라 일반 기업의 채용시험까지 군가산점을 확대하는 법안까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여성징집제와 군가산점제 논쟁 부활

현재의 군 기피문제는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군대문화와 이른바 돈과 권력으로 군대를 면제받는 ‘신의 아들’을 허용하는 불공정한 규칙에 대한 반발이다. 즉, 군사문화와 징병제 하에서의 계급간 불평등 문제, 그리고 의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의 폭력성의 문제이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작게는 군대민주화와 형평성 강화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침해하는 강제징집제를 해체하고 개인의 다양한 사상과 의지가 인정될 수 있는 새로운 군대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군가산점제는 젊은 남성들을 군대로 유인할 정도의 보상책도 되지 못할뿐더러 국가가 돈을 들이지 않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장애인들의 취업기회를 빼앗아 군대를 다녀온 남성 중 극히 일부에게만 보상하는 가장 비열한 수법이다.

여성징집제와 군가산점제 확대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평등’에 대한 개념이 호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군대를 가니 여성도 가야 평등하다거나, 여성과 장애인의 취업기회를 차단하든 말든 남성의 군대경력을 가산점의 형태로 보상해야 실질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굳이 ‘평등’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하더라도 이는 ‘강제적 평등’ ‘기계적 평등’에 다름 아니다. 모든 다른 사회적 맥락을 떼어 놓은 채 진공방 속으로 ‘군대’만 잘라 와서는 군대를 남성만 가고 여성은 안 가니 불평등하다고 판정하는 것이다.

여성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그들의 임금이 정규직 남성의 40% 미만에 불과하고, 여전히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부실해 여성의 경제참가율 곡선이 선명하게 M자를 그리는 상황에서, 여성에게 군대라는 또 하나의 짐을 얻어주는 것이 과연 ‘평등’을 말하는 것인가. 다른 취업기회가 막혀 상대적으로 공정한 공무원 시험에 여성들이 몰려 여성의 합격비율이 높다고 해서, 남성 역차별이니 이 분야에 남성할당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평등’이라 할 수 있는가? 

평등, 군사주의와 영합할 수 없다

이러한 논리가 비단 보수 남성들 사이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여성들이 군징집제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책임짐으로써 2등 시민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일부 여성계에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평등’은 단지 남성과의 동등함만을 집착하는 ‘협소한 평등’ ‘기계적 평등’이 아니다. 여성운동이 꿈꾸는 것은 현재의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반평화적, 반생태적인 지배구조에 근본적인 반기를 드는 것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은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평등’은 군사주의와 영합할 수 없고, 폭력과 공존할 수 없다. 현재의 징집제에 여성이 동참하는 것은 군사주의 내의 평등, 폭력내의 평등에 다름 아니며, 국방에 대한 무비판적 기여를 통해 여성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평등’으로 미화된 ‘의무’, 실질적으로는 더 공고해진 차별이다.

이제 정기국회가 다가온다. 물론, 국회 내에서 군가산점제 부활에 대한 논의가 만만치 않게 일어날 것이다. 이번 논의부터는 한 차원 더 성숙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무엇이 ‘평등’인지, 군대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정싸움이 아닌 토론이 되기를 기대한다. 토론이 된다면 빗발치는 기자들의 전화가 괴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