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공부방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주길 바라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은 “제 부모들처럼 안 살면 되지요.”이다.

처음 빈민지역으로 들어 갈 때 한 선배가 말했다. “네가 낳은 아이마저 빈민으로 키울 자신이 없으면 들어가지 마라.” 나는 기꺼이 가난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에 순응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가난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아이들에게 내 선택을 떳떳하게 권하지 못한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까지 가난을 거부할 자유조차 갖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밤 11시에 영은이가 아이를 안고 공부방에 왔다. 친정에 왔다가는 길이라고 했다. 영은이네 집을 떠올렸다. 영은이가 태어나고 자란 단칸방에는 아직도 화투나 카드가 널려있을 테고, 친정 엄마는 기름 때 절은 작업복을 벗지도 못한 채 방 한 구석에 쓰러져 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는 졸업하겠다고 이를 악무는 영은이 여동생은 텔레비전을 등지고 앉아 교과서를 뒤적거릴 것이다. 하지만 영은이는 그 단칸방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이 스물에 엄마가 되었다. 아기는 제 엄마를 닮아 피부가 하얗고 예뻤다. 나는 영은이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제 엄마한테 들릴만한 소리로 말했다. “아가야, 너는 정말 네 어미처럼 살면 안 된다.” 영은이가 웃으며 눈을 흘겼다.

12년 전 영은이를 처음 만났을 때 영은이는 집 앞 골목에 내놓은 장독 위에다 1학년 쓰기 책을 펴놓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달랑 방 한 칸인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친구들과 노름판을 벌여 놓았기 때문이다. 영은이는 재주가 많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만큼 욕심도 많았다. 그러나 열여섯에 영은이를 낳고 다섯 식구의 가장이 된 엄마는 영은이의 욕심을 채워 줄 재간이 없었다. 영은이 엄마는 철모르고 낳은 세 아이 때문에 도박과 약에 빠진 남편의 폭력을 견뎌야 했다. 여자의 몸으로 버텨내기 힘든 뱃일부터 용접 일까지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은이가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큰 벽에 부딪쳤다. 아이들이 엄마의 희망이 되려면 아이에게 쏟아 부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영은이 엄마는 아이들을 동네 학원에 조차 보낼 수 없었다. 남편 도박 빚을 대다 지친 영은이 엄마는 아이들 대신 술에서 위로를 받았다.

결국 영은이는 집을 뛰쳐나갔다. 우리는 영은이의 가출이 탈선이 아니라 기회가 되기를 바랐고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절대 엄마처럼은 안살아!”하고 외치던 영은이의 말이 실현되길 바랐다.

그런데 지난 겨울 영은이 엄마가 공부방으로 청첩장을 들고 왔다.

“영은이 년이 창피하다고 지가 못 오겠대. 이모, 내가 마흔도 안 돼서 할머니가 되게 생겼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청첩장을 갈기갈기 찢어 영은이 엄마에게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영은이 외할머니도 그 나이에 외할머니가 됐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리며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인 것은 충혈된 영은 엄마의 눈과 자줏빛으로 멍이 든 눈두덩이었다. 화를 내는 대신 애원하듯 말했다.

“영은 엄마, 제발 이제는 벗어나라. 응.”

그렇다면 영은이는, 그리고 영은이의 딸은 되풀이 되는 가난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2004년 한국 직업능력개발원에서 60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로 보면, 부모들의 학력, 가구소득, 다양한 문화적 환경, 사교육 따위가 아이들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얼마 전 고려대에서 2005학년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를 놓고 조사한 걸 보더라도 부모의 소득과 학력에 따라 수능점수가 50여점이나 차이가 난단다. 사교육비 평균은 강남지역과 읍면지역의 차이가 무려 63만원이다. 며칠 전 영은 엄마가 말했다.

“영은이 그 년, 자기애 어디다 맡기고 일 나간대.”

* 김중미씨는 2000년 창작과 비평사가 주최한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에서 <괭이부리말아이들>로 창작부문 대상을 받은 아동문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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