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 곳에 있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우물을 벗어나야 보이는 것도 있다. 나는 얼마간 여성계 일각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신통치 않았지만 조금은 여성계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다.

지난 몇 년간 여성과 관련된 법제도는 유독 변화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정부의 주요정책에 대하여 매년 성별영향평가를 수행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성별 영향 평가제도는 정책의 수립과정에서부터 미리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게 될 영향을 분석함으로써 정책이 특정한 성에게 미치게 될 부정적인 효과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 수단이다. 이 제도는 중앙정부만이 아니라 시·군·구를 포함한 전체 공적 영역을 포괄하고, 대부분의 정책 영역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인상적인 주요정책 성별영향평가 수행

여성발전기본법과 시행령에 따르면 중앙정부는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5년마다 여성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하게 되어 있다. 이 5개년 계획에 따라 중앙부처와 주요 시도는 매년 시행계획을 수립하고 자체적으로 그에 대한 성별 영향 평가를 실시해야 한다. 또한 시·군·구 단위에서도 매년 시행계획과 집행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성별 영향 평가의 영역에는 주요 정책 사업만이 아니라 성별 분리 통계와 예산 집행의 문제도 포함된다.

실효성의 문제가 있지만, 이 제도는 매우 놀라운 정책개입 수준을 보여준다. 별로 동의할 수 없다면, 성별 영향평가를 노동에 미치는 영향 평가로 바꾸어 읽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수준의 정책 개입과 참여가 가능한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또한 여성계의 이런 약진에도 여성노동정책이 형편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늘고, 성별 임금격차가 감소하고, 모성보호가 강화되었지만, 주로 정규직의 일부에게 해당된 것이다. 여성 경제활동인구는 올해 들어 1천만 명을 넘어섰지만, 여성의 취업여건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는 650만명, 비정규직은 400만명에 달하는데, 여성 조합원 수는 2003년 말 기준으로 33만여명에 그친다.

그러므로 지난 20년간 노동계가 약진한 결과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지 않다. 다만 여성계의 주류가 위로부터의 법제도 개선에 치중했다면, 현재 노동계의 주류는 아래로부터 성장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계의 투쟁의 결실도 나누지 못했고, 여성계의 법적 승리에서도 소외되었다.

여성노동자 노동·여성계 성과에서 소외

왜 그럴까. 거기에는 비정규직 문제와 같이 여성계와 노동계를 아우르는 공통된 이슈는 있었어도, 이를 실천할만한 조직화된 인적 자원이 부족했던 탓은 아닐까. 70~80년대에 형성된 여성 활동가들은 제조업 여성사업장이 도태되면서 흩어졌고, 90년대에는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로 인하여 조직화된 여성노동이 등장하지 못했다. 앞으로 청년여성은 어떨까. 청년여성은 고학력과 독립성, 성 평등의식으로 무장한 세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청년여성의 사회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들의 눈에는 여성계와 노동계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 것일까. 느낌으로는 페미니즘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노동계를 바라보는 시선보다는 우호적인 것 같다. 앞으로 청년여성이 조직화된 여성노동으로 등장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현재와 같은 사업장 단위나 소그룹 방식은 아닐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청년여성의 조직화 문제는 여성계와 노동계의 내일을 결정지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노동계의 가시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성 평등의 실현은 양 노총과 정당의 주요 강령이지만, 실천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요즘처럼 강령과 실천의 일치가 절실할 때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조합이 주요 정책에 대하여 스스로 성별 영향평가를 수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만약 노동조합이 스스로 성별 영향평가를 실시한다면 조직화방식은 어떻게 변할까? 또 매년 시기집중 임단투나 파업의 성별 효과에 대해서도 평가할 수 있을까?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는 데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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