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7월 말, 세 여자가 인사동 나들이를 하겠다고 나섰다.

남편의 폭력 때문에 집을 나와 쉼터에서 지내던 O희 아주머니는 우연히 인연이 닿아 우리가 하는 조사사업의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분이다. 언젠가 점심밥을 먹으며 이야기 하던 가운데, ‘나는 시내를 거의 나가보지 못했어, 인사동도 못 가 봤는 걸…’ 하시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조사사업 끝나면 인사동 놀러가자, 밥도 먹고 구경도 하자,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나 그 말이 성사된다고 했을 때 O희 아주머니랑 단 둘이 나들이 나갈 자신은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나 할까. 몇 년간 함께 활동해 온 OO노조의 O진 씨가 듬직한 우리의 나들이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이다. 7월의 마지막 금요일, 우리들 여자 셋은 회색빛 성수동을 탈출하여 인사동 진출에 성공하였다. 

OO노조와의 동거, 그리고 한 여성활동가

5년 전 사무실을 옮겨야 했을 때, 교통은 편하되 값이 싼 곳을 찾으면서 OO노조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 난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노동과 투쟁을 새롭게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를 발견하였다. 그 전까지는 영세노동자가 모여 있는 노조의 여성활동가를 만날 기회가 많지도 않았고,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OO노조에도 남성조합원이 월등히 많이 드나들었다.

노조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디인들 사람의 얘기가 없고, 사연 많은 노동자들이 없겠는가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정말 곡절도 많고, 얘기꺼리도 많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조합원들의 억울한 얘기, 안 풀리는 얘기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경로가 보이는 것이었다. 사무실에 온 조합원들도, 전화를 한 조합원들도 O진씨를 찾거나 다른 여자선배부터 찾았다.

노조에서 이 두 여성의 역할은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두 여성은 30대 중반이거나 이를 훌쩍 넘었다. 스무살 적 노동자의 길에 발을 내딛은 뒤 노동조합을 알고, 운동에 뛰어들었고, 갖은 고생도 하였다. 사무실에는 불안정하게 일자리를 전전하는 조합원들, 가족관계에 문제가 있는 조합원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여성상근자들 앞에서 이들은 철없는 막내동생이 되고, 카운슬러 앞에 앉은 고객이 되었다.

두 여성활동가의 그러한 능력은 본래 타고난 면도 있을 것이고, 노조활동을 하다 보니 체득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복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은 여성노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세상이 준 상처와 영광, 노동운동이 준 고난과 환희의 결결을 놓치지 않고 영혼의 키를 키운 그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늘 옆에서 투덜거렸다. 공식적으로 맡은 직책도 있고, 노조 일이 얼마나 많은데 매일 조합원들 치다꺼리 하고, 신세한탄을 들어주느냐, 남자들 앞가림은 저들이 알아서 하게 둬라.

여성노동자로 산다는 것, 새로운 세상 보여줘

그래도 조합원들 보듬어주는 왕 언니, 큰누나 역할은 계속되었다. ‘노동’ 이란 단어 하나에 모든 기대를 걸고 시작한 단체 상근자 생활, 처음 접한 대기업노조의 남성간부들은 나를 따로 불러 묻기까지 했다. ‘여고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거냐?’ 그 때는 그저 외모가 어려 보여서 그러려니 했을 뿐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대기업노조 사무실에 갔을 때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맛보고야 말았다. 노조의 잡다한 일을 보조하는 ‘사무직 아가씨’가 있었던 것이다. 노조가 그런 ‘소외된 노동자’를 고용하고, 우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를 시킨다는 것에 대해, 그 순간이 두고두고 떠올랐다.

그 후 특별히 여성노동자를 만날 기회는 별로 없었다. OO노조와의 만남은 노동자와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다. O진씨와의 만남은 살아있는 여성노동자, 여성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그날 인사동에서 우리들 여자 셋은 9천원짜리 원피스도 하나씩 장만하고, 동네 팥빙수 값의 몇 배를 주고 커플팥빙수도 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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