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총선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대구시당의 당직자들은 각 지역구 선거운동본부에 파견되었고, 오로지 나만 남아 비례대표 선거운동과 대구지역 총괄 언론, 기획사업을 맡고 있었다.

매일 민주노동당의 정책, 공약에 근거한 아이템을 하나씩 잡아 말하자면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내 일이었다. 기획, 언론보도, 기자조직, 노동조합 및 단체교육, 게다가 선거관리위원회업무까지….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간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후다닥거리고 있는데 사무실 전화벨 소리는 그칠 줄 모른다.

그놈의 전화는 방송토론이 있었던 날이면 새벽 1, 2시를 가리지 않고 울려댄다.

나중에 선거운동 후일담으로 많이 얘기 되었던 것도 바로 민주노동당을 응원하고 격려한 시민들의 전화내용이었다. 

“아가씨 말고 남자 바꿔라”

그러나 사실 내겐, 힘이 되기도 하고 열을 받게도 한 이 전화들이 선거기간 내내 엄청난 고통과 생채기였다. 기분이 좋아 민주노동당을 응원하려는 사람들도, 못마땅하여 항의를 하려는 사람들도 모두 하나같이 하는 말들.

“아가씨 말고 다른 사람 없어요? 책임자와 통화하고 싶은데.”

내가 책임자라고 얘기를 해도 막무가내로 더 높은 사람을 찾는 이들이 많다. 더 높은 사람 누구?

바로 남자!!

아예 대놓고 ‘남자’ 바꾸라는 사람들도 있다. 남성 당직자들은 직책을 막론하고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당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이런 일은 비단 일반인들로부터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번은 선거 막바지 무렵 지역 생활지에 정당투표 광고를 싣기로 했다. 기호 12를 형상화한 이미지 광고가 선거법에 약간 문제가 되어 선관위 담당자와 실랑이가 오래 되었다. 그러자 마지막엔 마찬가지로 ‘책임자’, ‘더 높은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그날 사무실 전화기가 부수어질 뻔 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대구시당으로 노동상담, 민생상담을 하러 방문하시는 주민들, 절박한 눈빛으로 사무실을 들어오시지만 먼저 맞이하는 내게는 눈길도 잘 보내지 않고 파티션 너머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남성 당직자들을 찾아 목을 뺀다.

동네에서 주민들을 만나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 노동조합, 단체에서 민주노동당 대구시당 부위원장이라고 소개하면 야릇한 눈길로 “아, 넘버 2”라고 한다.

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

‘많아 보이지도 않는 나이에, 그것도 여자가, 무슨 경력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벌써 정당의 2인자냐’라는 것이다. 

‘남자 바꿔라’란 소릴 듣지 않기 위해

처음엔 그 눈길과 무언가 더 물어보고 싶어 하는 상대의 몸짓을 견디기 힘들어 내가 먼저 어떻게 활동했고 왜 민주노동당 대구시당의 부위원장이 되었는지 주절주절 설명했다.

나와 비슷한 연배, 경력, 위치에 있는 남성에게는 절대 물어보지도 않고 설명할 이유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나는 나 스스로에게 또한 타인에게 그렇게 확인받듯 떠들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겨지기도 해서 하지 않는다. 그래도 같은 일을 당하면 불쾌한 것은 마찬가지다.

광역, 기초 가릴 것 없이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자치의원 전체 176명 중 3%도 채 안 되는 단 5명만이 여성인 동네. 보수색이 워낙 짙어 여성운동을 하는 활동가조차 ‘2006년 있을 지방선거에 여성운동가들이 이당, 저당 가릴 것 없이 모든 당을 달고 다 진출해야 할 것 같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동네.

이게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난 젊지도, 그렇다고 연륜이 그렇게 쌓이지도 않은 ‘여성’이면서 권력을 탐하고 있다. 삶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기구,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뭐 거창한 이런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여성들이 더 이상 ‘높은 사람 바꾸라’는 전화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나를 봐야 하는데 다른 곳으로 두리번거리거나 알 듯 모를 듯 하다는 그런 눈길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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