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에 공시된 바에 따르면, 지난해 KT의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5,130만원이다. 이 금액에는 각종 복지혜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 동일업무를 하는 KT의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체로 월 18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이 금액은 통신수리공에게 필수적인 통신요금, 차량유지비 등의 비용이 포함된 액수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계산하면, 대체로 KT의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3배가 된다. 순수노동시장의 논리로 얘기하자면,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울타리가 제거된 채 노동시장에 내동댕이쳐질 때 임금이 1/3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현 KT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에 노동력 시장가격의 2배 정도의 초과이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초과이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실상 유선통신시장에서 독점적 성격을 띠고 있는 KT의 독점이윤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비자로부터 얻은 초과이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하도급 업체와의 불공정 계약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에도 못 미치는 초과착취 임금에 기초한 것이다.

민영화 이후 KT는 공기업 시절과는 달리 독점적 지위를 적극적인 수익 창출의 기회로 활용하면서 엄청난 돈벌이를 하고 있다. 매출은 10조원을 훌쩍 넘어섰고 당기순이익은 꾸준히 1조원대를 유지하며 2조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민영화 이후 KT 정규직의 임금인상은 KT의 막대한 이익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2~3%에 머물고 있다. 민영화를 위한 해외매각이 시작된 1998년 1억5천만원에 불과했던 1인당 매출이 2003년 3억원을 넘어섰음을 감안하면 KT의 초과이윤 배분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은 매우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고용안정이 먼저냐, 임금인상이 먼저냐

이러한 낮은 임금인상에 대해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만이 적지 않다.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은 ‘이러한 낮은 임금인상률은 사측의 협조세력에 불과한 무기력한 노동조합 때문’이라며 ‘강력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주장에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정 정도 동의를 표한다. 실제로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발전에 비하면 임금인상이 형편없다고 느낀다. 특히 안정적인 고용보장이 전혀 작동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로서는 당장의 임금인상이 절실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다.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에 노동시장에서의 시장가격보다 2배 이상의 초과이윤이 포함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다. 그래서 회사 발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인상에 대해 불만을 갖지만, 동시에 KT라는 기업이 제공하는 울타리가 아니면 현재의 임금수준이 유지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케이블TV, 초고속인터넷 등 새로운 유선통신 분야의 등장으로 통신수리공이 부족했던 2000년대 초반까지와는 달리 지금은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통신수리공들의 임금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이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격차의 확대는 고스란히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구조조정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줄어든다. 초과이윤의 대부분을 자본이 챙기는 셈이다. 이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은 높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의 시장가격과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간의 격차가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불만이 투쟁으로 폭발하지 않는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노동자들은 두 가지 노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나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통해 회사의 성장에 걸맞는 임금인상을 쟁취하는 노선, 이른바 ‘강성’ 노선이다. 이는 독점으로 KT가 확보한 초과이윤 배분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을 늘리자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력의 시장가격과의 차이 속에서 정규직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임금인상 등을 자제하며 회사 경영에 협조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KT의 초과이윤 창출에 적극 협조하자는 노선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협조주의’ 노선이 우세해진다.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하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거의 동결 수준이어도 격차는 확대되며, 격차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KT의 초과이윤 가운데 정규직 노동자의 몫을 투쟁으로 확보하자는 강성노선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 결과 노조는 점점 협조주의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왔다.

'강성' 노선과 '협조주의' 노선은 동전의 양면

그런데 많은 활동가들은 거꾸로 현장에서 협조주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강성’ 투쟁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협조주의 세력의 강화는 위기의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대기업 노조에서 외형상 매우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노선의 차이는 실제로는 초과이윤을 배분받는 방식 및 배분의 양과 관련된 전술적 차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두 노선의 외관상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노선은 현재 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딜레마의 즉자적 반영에 불과하다.

협조주의 노선이든 강성 노선이든 두 입장 어느 것도 독점 대기업의 초과이윤의 원천인 독점이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하청 노동자간의 차별구조 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 한 지금의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지 않은가!

이미 KT의 구조조정 압박은 기업 내적인 데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KT는 여전히 돈을 잘 벌고 있고 부도날 위험도 전혀 없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하락은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를 계속 확대시키고 있고, 이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의 강력한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은 기업 내 초과이윤 분배 차원을 조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에 대한 그 어떤 운동적 개입도 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압박해 들어오는데, 그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이 기업 내적인 초과이윤 분배에 머문다면 승부는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조원들은 강성 노선이든 협조주의 노선이든 노조가 지금 노동자의 삶의 딜레마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이 차이가 굉장한 차이인 것처럼 주장한다. ‘강성=변혁적’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있다. 그래서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을 협조주의 세력 탓으로 돌리고 정작 자신의 운동노선이 초과이윤 내에 갇혀 있음을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초과이윤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분배 방식에서 강성이냐 아니면 협조주의냐의 차이를 절대적인 차이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강성=변혁세력’임을 자위한다.

초과이윤에 안주하는 노동운동과 초과이윤을 문제삼는 시민운동

최근 민영화 이후 KT의 경영이 공공성을 외면하는 데 대해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KT의 초과이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KT가 막대한 이윤에도 불구하고 요금인하를 하지 않는 데 대해 문제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종량제 도입 반대, 사회 공공성을 위한 적절한 공공투자 확대 요구, 주주가치 중심의 고배당 비판 등 여러 각도에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제기의 핵심은 공적 기업인 KT의 초과이윤을 주주들의 사적 소유 대상으로 할 게 아니라 사회화 하라는 요구이다.

여기서 필자는 과연 어떤 운동이 더 진보적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초과이윤에 안주하는 노동운동과 초과이윤을 문제제기하는 시민사회 중 과연 누가 진보적인가! 노동자가 하는 운동이라고 다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의 진보성이 인정되는 것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노동자들이야말로 가장 착취당하는 존재이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철저하게 변혁시켜야 하는 역사적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동자들이 하는 운동이어서 진보적인 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보편적 인간해방이라는 역사적으로 부여된 사명을 수행할 때 진보적인 것이다.

노동운동의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협조주의 세력의 발호 때문도 아니다. 노동운동이 근본적인 자기성찰을 게을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초과이윤 확보 방식을 둘러싸고 전술적 차이만을 절대화 했을 뿐, 사회 보편적인 관점에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분할지배전략에 맞서 노동운동의 대응을 모색하지 못한 우리 스스로의 책임이다.

스스로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독점 대기업의 필터를 통해 바라보는데 익숙해진 우리 활동가들의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는 데서 변혁성을 찾기보다는 협조주의 세력과 대립에서 변혁성을 자위한 우리의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우리 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업의 울타리 내에서 ‘강성=변혁적’이라고 자족하는 게 아니라,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노동운동을 재구성하려는 진지한 자기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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