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정치참여는 오랫 동안 정치개혁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는 여성할당을 아예 선거법에 명시할 정도이고, 노선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여성이 현직 정당 당대표를 맡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의 정치참여는 이렇듯 현실이 됐다. 그러나 여성들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고군분투'와 '좌충우돌'의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했을까.

그것은 창당 때부터 여성의 정치참여를 당헌과 당규에 명시했던 민주노동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민주노동당 광역시의원으로, 또 한 명은 지구당위원장이자 총선후보, 대변인으로 일찌감치 여성의 정치참여를 실천해 왔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궤적은 남성우월주의의 가부장 문화와 신자유주의의 비정으로 고통받는 우리 여성들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민주노동당의 윤난실 광주광역시 의원과 홍승하 대변인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로 했다. 쉽지 않은 원고 청탁에 흔쾌히 동의해주신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편집자 주>



“동생들은 인자 니가 갈쳐라.” 교육대학 진학을 원했던 부모님의 바램이었다. 그런데 이 바램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학원 민주화의 거대한 물결은 지방의 조용한 단과대학이었던 광주교육대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예비교사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한 결과는 무기정학이었다.

그저 역사의 흐름에 순종했을 뿐

그저 역사의 흐름에 순종했고, 노동야학에서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 인연이, 어설픈 현장노동자로, 노동단체 활동가로 그리고 노동조합의 실무자로, 그렇게 내 인생의 20대와 30대를 규정했다.

‘윤정치’ 별로 좋은 별명은 아니다. ‘정치’라는 단어는 여전히 탐욕과 부패 등 부정적 이미지로 먼저 다가온다. 더구나 현장 활동가들에게 정치는 ‘출세를 위한 도구’를 의미하는 말로 더 많이 인식돼 있었다. 전노협 시절에도, 민주노총 시대에도, 정치는 그랬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것은 언제나 정치였다. 노동자정당 건설은 너무도 당연한 과제였다. 민주노총에서도 노동자정당 건설사업에 줄곧 목청을 높였다.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음악회,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지역원탁회의, 정치교육, 조합원 정치의식조사, 후보 발굴교육 등 이런 저런 사업들을 기획하고 집행했다. 이런 나를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어떤 간부는 농담으로 ‘윤정치’라고 부르곤 했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2000년 ‘민주노동당호’가 닻을 올렸다. 그리고 2002년 6월 지방선거. 처음으로 후보가 아닌 정당에도 투표를 한단다. 당시 나는 광주시당의 여성할당 부지부장을 맡고 있었다. 비례대표 1번은 무조건 여성. 졸지에 후보가 됐다. 비례대표 후보인 탓에 지역구 출마자보다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선거운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지역구 후보자들과 민주노총에서 당 선전에 매진하며 선거운동을 대신했다. 재정은 당원들이 십시일반 주머니를 털었고,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또 조금씩 월급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덜컥 당선이 됐다. 반민주당 정서와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19명의 광역시의원 가운데 딱 한 사람,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을 당선시킨 것이다.

노동운동 ‘첫마음’ 그대로

선거가 끝난 다음날 아침부터 인터뷰다. 인터뷰를 마치자 담당 PD가 웃으며 한마디 한다. 말이 너무 세단다. 이제 당선증을 받으러 간다. 비례대표인지라 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시장 당선자와 함께였다. 파란색 껍질을 입힌 당선증을 바라본다.

출근 전에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퇴근하면 또 곧바로 선거사무실로 결합하고, 틈만 나면 전화통을 붙들고 “정당은 민주노동당이야”를 목이 쉬도록 외친 당원들의 땀, 결집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힘. 이제는 노동자와 서민의 무기가 돼야 할 바로 그 당선증이다. 나직이 다짐한다. 노동운동 ‘첫마음’ 그대로, 진보정당 운동 신심 그대로.

‘초짜의원’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방자치가 뭔지도 모른 채 지방의원이 되었다. 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일상적으로 관계했던 노동업무가 국가사무인 탓도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가 지나치게 중앙 중심임을 여실히 느꼈다. 유권자들은 오히려 국회의원 이름은 알아도 자기가 사는 동네 지방의원 이름은 모른다. 국가사무는 알아도 지방사무는 또 잘 모른다.

의회의 일반적 운영은 형식적이었다. 낯설었다. 본회의장의 의사진행은 지나치게 엄숙했다. 박수도 없고 유머도 없다. 정말 재미없고 딱딱하다. 박제화 돼 있었다. 연령은 참 편리한 기준이었다. 좌석배치는 연소자부터, 임시의장은 최고령자가. 그리고 상임위 간사는 상임위의 최연소자가 맡는 식이다. 관례에 따른 배치다. 진짜 보수적이다.

광주시 각국의 업무보고는 도통 외국말이었다. 건설, 지역경제, 도시교통, 지하철 건설 등등을 관장하는 산업건설위를 상임위로 결정했으나. 용어부터가 낯설었다. 용적률, 건폐율 등등은 땅 한 평 갖지 못한 무산자인 내게 지금껏 별 상관없는 용어들이었다. ‘광산업이다’, ‘첨단산업이다’, 모두 노동이 배제된 자본 중심의 지역경제도 딴 나라 이야기였다. <지방자치개론>, <행정학>, <의회회의록>등을 읽었다. 조금 개념이 선다.

“지금은 어둔 극장에 막 들어온 것 같이 깜깜하지라우. 근디 금새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오.” 의회사무처에서 전문위원으로 있었던 공무원의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말은 정말 명언이었다.


내부고발자

임기가 시작된 지 두 달쯤 지나 의회에서 연찬회를 다녀왔다. ‘지방자치와 지방의회 활성화 방안’, ‘국회와 지방의회 차이’, ‘지방행정 사무감사, 조사제도와 기법’ 등 초보의원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었다. 상당한 기대를 갖고 참여했다. 그런데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의원단을 환송하기 위해 시장을 비롯한 고위공무원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초식’인가 싶다. 시간을 지키지 않은 의원들까지 기다리며 일할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의전이다.

더 큰 문제는 시집행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기관인 의회에서 시장을 비롯하여 시교육청 등 행정기관으로부터 찬조금을 받았다고 한다. 거기다 의회 출입기자단이 몽땅 연찬회에 동행했다. 그리고 동행한 의회 출입기자단에게 일명 촌지까지 지급한 것이다. 또 교수님의 2시간 강의비는 노동자 한달 최저임금보다 훨씬 많았다. 찜찜했다.

당원들과 나 자신에게 약속했던 대로 의원연찬회를 다녀와 의정보고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이 의정보고 내용은 여기저기 언론에 기사화 됐다. 의원들과 의회 출입기자들 모두에게 확실히 찍혔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시민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내부고발자’로 민주노동당 의원 신고식을 치룬 셈이다. 이렇게 나의 초짜 의정활동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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