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초 한국노총이 비정규직 문제를 내걸고 총파업을 감행할 때, 일부 노동자들이 한국노총 위원장에게 “민주노총처럼 싸워 달라”는 말을 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 한국노총도 투쟁을 하고, 간간히 민주노총도 하지 못하는 일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런 한국노총이 민주노총도 하지 못한 비정규직 철폐를 내건 총파업을 어쨌건 해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민주와 어용의 구분이 없다?

한국노총이 좀더 투쟁적으로 변하는 건 어떤 이유에서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측면만 있을까? 얼마 전 만난 민주노총 소속 한 노조 간부의 말이 귀전을 떠돈다. “지금 현장에 민주와 어용 구분은 없습니다. 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집행부라도 위에서 내려온 지침을 대충 수행하는 모양새를 갖춥니다. 근데 현장에서는 ‘개판’입니다. ‘민주파’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어용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자기 사업장에서는 이래저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80년대에 시작해 9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현장조직과 정파에 참여하거나 혹은 연관을 맺으면서 성장한 일군의 부대들이 ‘민주파’라면, 그러한 운동을 비판하며 사측과 협력하며 노조운동을 기업 내부 차원의 근로조건 개선 활동으로 제한했던 일군의 무리를 ‘어용’이라고 구분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 노조 간부의 말대로라면 민주와 어용의 구분은 모호해졌다. 그 분의 지적이 어용으로 지칭되었던 무리들이 사측과의 협력, 기업 내 근로조건 개선으로 제한했던 활동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민주파를 자처하는 일군의 부대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세상을 바꾸는 노동운동보다는 기업 안에서 조합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또 다른 간부의 진단은 이렇다. “자본이 노조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줄 건 주면서 노조를 달래고, 회사가 필요한 것을 받아낸다.”

물론 아직도 수많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줄 것을 아까워한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끓는 투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눈물어린 장기투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를 관리하려는 자본가들도 적지 않다.

금속연맹에서 현대중공업 노조 제명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 국내 대기업 노무담당자 회의에서 노무관리를 잘 하기로 소문난 한 기업의 노무담당자가 현대중공업 노무담당에게 “현대중공업 노조가 제명되는 사태를 만든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단다. 왜 그랬을까? 민주노총 안에서 ‘어용세력’이 장기집권 하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전략에서도 자본은 노조를 ‘활용’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자는 현대자동차 그룹의 노무관리 방식을 ‘협상을 통한 변화 전략’이라고 규정했다. 노조와 충분히 논의를 하되 회사의 뜻대로 밀고 나간다는 의미다. 이걸 뒤집으면 노조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결국은 회사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노조들이 총량적인 고용 숫자의 유지, 일할 수 있는 물량 확보에만 집중하고 있고, 회사는 그것을 약속하면서 자신들이 구상한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조합원으로 살아남기?

아픈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고 했다. 경제위기 때 부도난 기업의 노동자들이 당한 고통은 모두가 안다. 기업의 매각 과정은 정리해고와 희망퇴직으로 점철됐고, 임금조차 제대로 보존받지 못했다. 우리 노동자들은 기업이 망하면 노동자가 괴롭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해버렸다.

민주노조운동은 개별 노동자들이 가슴에 새긴 상흔을 싸매주고 덮어줄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노동시간 단축은 오히려 전업과 특근시간을 늘렸고, 해마다 반복되어 온 구조조정 저지투쟁은 어느새 기업단위의 대응과 협상에 갇혀 버렸다. 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투쟁은 ‘상층교섭’ 문제로 왜곡되었고, 신자유주의에 맞선 저항은 국제(금융)기구나 국제회의에 맞서는 행동 그 이상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이제 기업의 상태에 따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회사가 잘 나가는 경우 “벌 수 있을 때 벌어보자”는 태도를, 회사가 어렵다고 하면 조합원들도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큰일 날 생산성 향상운동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벌이지기도 한다. 물론 술자리에서 불만은 수없이 토로되지만….

조합원들이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연히 노조 분위기도 바뀔 수밖에 없다. 집행부나 대의원들로서는 일단 조합원들에게 무언가를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노동운동으로, 세상을 향한 어떤 행동으로 희망을 만들 수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조합원들이 회사의 전망, 기업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한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를, 구조조정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이런 상태라면 노조 위원장이 물량을 수주하기 위해 외국 바이어를 만나고 노사화합을 과시하는 ‘노사상생’이 훨씬 감명을 줄 것이다.

버릴 것은 버리자

기업의 유지를 통해 고용을 보장받고, 기업의 성장을 발판으로 임금을 올리는 노조운동이 반복되는데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이 가능할까? 이런 상황 속에서 임금동결은 어용이고, 10% 임금인상을 민주노조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10%의 임금인상을 위해 옥쇄파업을 하는 것이 계급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단언하건대, 현재 대부분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임금인상투쟁은 기업의 지불능력 안에 온전히 갇혀 있는 개량적 경제투쟁일 뿐이다.

단위노조에 속한 조합원들로서는 당장 자기 목구멍에 풀칠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그런 조합원의 이해에 즉자적으로 조응하는 일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분배의 양을 둘러싼 투쟁에 몰입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기업의 크기, 자본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개별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회적·국가적 수준에서 자본의 이윤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재분배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자본과 그들의 정치적 지지자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개별 사업장의 임단투, 형식적으로 설정되는 상급노조의 임금협상은 이제 과감히 그만둬야 한다.

임금인상투쟁만을 예로 들었지만 주어진 틀 안에서 관성적,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것들을 우리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 10여년 전에는 노동자를 각성시키고 결집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더라도 현재 자본이 허용하는 틀 안에 머무르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조합원의 손에 무언가 쥐어주는 일에 골몰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노동운동의 모습일 수 없다. 아주 잠깐 조합원들로부터 원망을 듣더라도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으로 나서기 위한 내용을 생산하고, 그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제 노동운동은 완전히 새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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