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큰오빠가 재단사로 일하는 숙녀복을 만드는 공장 ㅡ 청계천 버들다리(전태일 다리) 왼편 평화시장 본관3층에 있었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가지고 밀리는 버스를 타고 오빠를 따라 공장에 도착하면 8시 정도. 잠을 더 자야 하는데 라면서 짜증스럽게 입을 잔뜩 내밀고 투덜거리면 오빠 뒤를 따라 공장 문을 들어서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벌써 공장안은 내 또래의, 더러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시다들이 그 전 날 받아 놓은 일감들을 재봉틀 판 위에 가지런히 일의 순서에 따라 정리를 하느라 재단사 오빠가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싱사 언니가 출근하는 동시에 박음질을 시작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분주하게 일감들을 다림질하고 연필로 줄을 긋고 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어 너희들 일찍 나왔구나! 어제 막차 놓치지 않았니?”

오빠가 들어서면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시다들을 향해 걱정이 담긴, 그렇지만 크고 반가운 목소리로 공장안의 긴장된 분위기를 깨면서 하루의 일은 시작된다.

한 주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정이 되어야 집에 들어오는 일이 너무 힘들어 어떻게든지 꾀병을 부려 공장에 안 갈 수 있는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식후증 때문에 꾸벅꾸벅 졸다가 이마를 다리미에 푹 들이받아 이마가 시뻘겋게 대어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 미싱사 언니의 벼락같은 호통이 들여왔다. 너 재단사 동생이라고 봐주니까 안 되겠구나 하면서 일감을 내 얼굴에 집어던지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장 시다 바꿔줘요, 저 오늘 일 못해요” 하면서 오빠에게까지 화를 내었다. 오후쯤 되어서 오야미싱사가 위가 안 좋아 약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는 틈을 타 공장 밖으로 나오게 되자 나는 약을 사러 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곧바로 창동행 12번 버스에 올라앉았다. 햇빛이 유난히도 쨍쨍한 겨울 오후의 화창한 날씨는 나를 유혹하기에 한 점의 부족함이 없었다.

밤늦게 공장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큰오빠를 피해 자는 척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가슴은 두근두근하면서 오빠와 어머니의 대화를 들으면서 한편 걱정은 조금 벗어지면서 불쌍한 미싱사 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 순옥이는 방학 동안만 일을 하지만 그 또래의 많은 시다들은 점심도 거른 채 날마다 해야 합니다.”

내가 일하던 공장은 창문이 없어서 하루 종일 햇빛 구경을 못했다. 평화시장 2~3층 공장안에 햇볕 한 점 안 들어오는 이유는 평화시장건물 밖으로 창문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ㅡ 공장안은 먼지가 하얗게 덮인 백열등 빛으로 어둠침침해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안질이 나빠져서 대낮에 밖으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햇빛에 눈이 부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눈을 뜰 수 없었다. 청계천 도로변으로 창문이 없었던 이유는 고가도로 위로 높은 사람들이 탄 자동차가 지나갈 때 공장안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청계천고가도로는 한국의 압축 경제성장과정에서 압축적인 노동착취의 결과로 만들어진 60~70년대 한국산업화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제 청계천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복원되어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맑은 내 전태일”의 정신을 청계천에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벽돌들이 청계천 버들다리에 놓이게 된다. 큰 오빠 전태일이 사랑하던 시다들의 영혼이 있는 곳, 큰 오빠의 마음의 고향인 평화시장 청계천에 영원히 자신을 묻은 지 35년, 수많은 전태일과 수많은 시다들이 청계천 맑은 냇가에 옹기종기 모여 않아 지난날들의 고통과 아픔일랑 맑은 내와 함께 흘려보내고, 노동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꿈꾸면서 큰 오빠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작은 벽돌에 새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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