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는 정경언 유착 의혹을 담은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의 내용보다는 ‘불법도청’에 논란을 강조하고 있어 정치권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 든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히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이 8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경언 유착보다 도청 문제가 본질”이라고 발언하는 등 정치권과 청와대가 사건의 방향을 정경언 유착보다는 ‘불법 도청’쪽으로 의도적으로 몰아가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8일 청와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 중 도청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이라며 “도청은 정경유착보다 심각한 인권침해이고,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해 국민에 대해 가해지는 범죄행위여서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테이프 내용 공개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도청에 관한 문제는 다 공개될 것이지만, 테이프 내용을 어디까지 공개하고 어디까지 공개하지 않을 것이냐는 법에 따라야 한다”며 “국민 70%가 공개를 요구하고 있고, 사회정의를 위해 반드시 밝혀져야 될 구조적 비리문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 여당의 특별법 제정에 힘을 실어줬다.

이에 따라 특검 등을 통해 테이프에 담긴 정경언 유착의 실상을 공개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려는 시도가 주춤거리는 형국이다. 여당은 테이프 내용 공개를 ‘역사적 진실 규명’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야4당도 특검 법안을 공동 발의하기로 했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은 실정법 위반에 대해서 공개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자신들이 연루됐을 수도 있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내용은 피해가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노 대통령의 발언에 정치적 의도가 섞여 있다며 특검 수용을 거듭 촉구했다. 김성희 부대변인은 논평에서 “불법도청과 정경언 검은 커넥션은 경중을 따질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독재의 검은 젖을 먹고 자란 쌍생아”라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문제를 두고 무엇이 본질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의도로 해석될 수 있으며 불법도청만으로 정경언 유착을 덮으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단 수석부대표도 이날 브리핑에서 “음모론이 사실이 아니라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특검과 국정조사를 수용하는 것이 백번의 말보다 진정성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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