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8일 이후 ‘신용불량자’라는 용어가 사라졌으나 실제로는 '한번 연체자는 영원히 연체자'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야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현실에 대해 어떤 정부관계자나 금융전문가들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 연체자들은 절망만을 되씹고 있을 뿐이다.

박모씨는 모 기업의 신규채용에 지원, 수십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박씨에게 연체 및 신용불량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금융조회 동의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신용불량자이거나 연체중일 경우 업무집중도가 떨어지는 게 부담스럽다는 것이 회사측이 내놓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는 거대금융자본이 고금리를 노리고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신용불량자가 된 국민들에게 법이 허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다시 말해 회사측이 말하는 업무집중도 저하 현상은 바로 금융자본의 법을 어긴 악랄한 추심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통이나 걸려오는 독촉 전화, 법원서류를 가장한 붉은 도장이 잔뜩 찍힌 법적조치 예정통고서, 십년이나 된 중고차에 덕지덕지 붙은 채권가압류 등은 업무집중도를 당연히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툭하면 회사로 찾아오겠다며 변제를 요구하지만 없는 돈을 어찌 만든단 말인가. 업무상 받는 전화보다 추심원에게 받는 전화로 하루를 보내게 되니 어느 상사가 곱게 보겠는다.

이렇듯 지난 수년 동안 한국의 연체자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왔다. 사적인 채무관계라는 이유로 이들이 당하는 인권침해는 철저히 사회로부터 외면당해 왔다. 사법당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은 ‘국민’이기를 거절당한 것이다.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불법추심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자, 국회는 2001년 3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불법추심에 대한 엄격한 처벌조항을 삽입하였다.

이 개정안은 채권추심업무를 행함에 있어서 금지하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거나 위계 또는 위력을 사용하는 방법(5년이하의 징역 혹은 5000만원 이하의 벌금)
2. 채무자의 채무에 관한 사항을 정당한 사유없이 관계인에게 알려 부담을 주는 방법
3. 심야방문 등과 같이 채무자 또는 그의 관계인의 사생활 또는 업무의 평온을 심히 해치는 방법
- 사생활을 방해하는 행위(오후9시 이후 오전8시 이전의 전화, 주말전화, 잦은 전화)
- 정당한 사유 없이 채무자 직장을 찾아가 업무를 방해하거나 모욕을 주는 행위(3년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

이렇게 법률은 연체자의 사생활과 생존권을 지켜주는 조항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연체자의 인권은 '개발의 편자'처럼 인식되고 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박모씨처럼 연체자가 어렵게 취업시험에 합격을 해도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체자의 신용회복을 주관하는 신용회복위원회의 한복환 사무국장은 “연체를 하게 되면 추심에 시달리고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업무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면서 “단순업무같은 경우는 신용정보가 중요하지 않더라도 웬만한 기업에서는 반드시 체크할 만한 사항”이라고 설명한다.

업무에 소홀해질 정도로 추심을 당하고 있는 연체자에 대한 불법추심 방지대책을 안내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금융전문가가 오히려 연체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당연시 하면서 이들의 갱생을 돕기 위한 노력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신용회복위원회의 태도는 그동안 신용회복위원회가 신용불량자의 갱생보다 채권회수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개인워크아웃신청자들의 호소가 사실무근이 아님을 반증한다. 이제라도 신용회복위원회는 연체자 보호를 위해 채권기관들의 전근대적인 채권회수 일변도의 보복적 신용정보관리행태에 대해 그 오류를 지적하고 연체자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신임 재정경제부 장관들이 가장 즐겨 찾는 사적 채무조정기구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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