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에서 진행 중인 노동법제 개편 논의가 심상찮다. 종속적 관계에 있는 노동자들의 기본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기 위해 근로조건의 ‘최저’선을 정한 ‘노동기준법’(우리나라 근로기준법) 이외에 ‘노동계약법’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기준법은 법이 정한 최저기준 이하로 근로조건을 저하시킬 수 없음을 규정한 법인데 비해, 노동계약법은 노동기준법상의 근로시간, 휴일휴가, 임금 등에서 노동자와 사용자간 ‘계약’을 체결하면 노동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노동기준법에는 ‘1일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돼 있지만 어느 노동자가 사용자와 ‘특정일에는 8시간을 초과할 수 있다’는 계약을 체결한 경우 이를 정당한 ‘노동계약’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창조적, 전문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율적인 노동방법을 ‘자주’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유리한 조건 우선의 원칙’이 특정 계약을 맺은 노사 당사자에게는 적용제외(opt-out)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의 개별 노동법은 노사 당사자의 자주적인 결정을 촉진하는 ‘노동계약법’과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해 벌칙이나 감독지도에 의해 최저기준 확보를 도모하는 ‘노동기준법’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현재 이 같은 노동계약 관계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이른바 ‘노동계약법’에 대한 입법화 작업이 후생노동성 산하의 ‘향후의 바람직한 노동계약법제에 관한 연구회’(연구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정 한국외대 교수(법학)는 최근 발간된 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브리프(7월호)’에서 현재 일본의 논의내용을 소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연구회는 노동계약에 관한 포괄적인 룰(rules)을 명확하게 정비한다는 목적아래 지난해 4월 발족됐고, 그간 20여 회에 이르는 연구회를 거듭한 끝에 지난 4월13일 ‘중간보고서’를 발표했다. 최종 보고서는 10월께 제출될 예정이다. 그런데 노동계약법제가 처음 논의된 것은 지난 93년 후생노동성이 ‘향후의 바람직한 노동계약법제에 대하여’라는 ‘노동기준법연구회’ 보고서를 제출하면서부터. 하지만 당시에는 근로조건을 명확히 함으로써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분쟁해결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근로조건의 명시나 취업규칙상 규제 내용의 정비 등을 제언했을 뿐 포괄적인 노동계약법제 도입에 대한 검토는 충분치 못했다. 이에 비해 이번 중간보고서는 노동관계의 성립(채용내정)에서부터 노동관계의 전개(취업규칙, 배치전환, 휴직, 징계), 노동관계의 종료(해고), 기간고용, 중재에 이르기까지 노동계약관계를 둘러싼 법적 문제들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취업형태 다양화 따른 노동조건 개별 결정 필요

중간보고서를 발표한 일본 동경대의 스게노 카즈오(菅野和?) 교수(법학)는 노동계약법제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노동조건 결정의 개별화 진전 △급격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신속·유연한 노동조건 변경의 필요성 증가 △개별 노동관계 분쟁 증가 △집단적 노동조건 결정 시스템의 기능저하 △노동자의 창조적·전문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율적인 노동방법에 대응한 노동시간법제의 재검토 필요성 등을 꼽았다.

스게노 교수는 “민법의 특별법인 노동계약법제를 제정해 노사 당사자가 그 실정에 따라 자주적으로 노동조건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노동계약의 내용이 적절한 것이 되도록 노사 당사자의 행동규범이 될 공정하고 투명한 룰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스게노 교수는 이어 “온전히 민사적 효력을 지닌 판례법리를 그대로 노동기준법에 포함시키려 한다면 벌칙과 감독 지도에 의해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을 보장하는 노동기준법에서 성격이 다른 규정이 늘어 법률의 체계성이 손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상자기사 참조>

실제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 이라 불리는 장기불황으로 90년대 말부터 산업전반에 걸쳐 구조개혁이 본격화되고, 이런 가운데 인사·노무관리 및 노동자들의 취업형태나 취업의식이 개별화되고 다양해져 왔다.

이는 ‘노사분쟁’에서도 변화를 촉발시켰는데, 집단분쟁은 줄어들고 개별분쟁은 오히려 증가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집단분쟁은 줄고, 개별분쟁은 늘고

집단분쟁은 노사관계 안정과 노조 조직률 저하 등의 이유로 대폭 줄었다. 1차 석유위기 이후인 74년에 1만462건이었으나 최근에는 연간 1,000건 가량으로 줄었고, 노동위원회 쟁의조정 신규건수도 74년에 2,249건이었으나 90년 초에 300건 정도로 감소했고, 다만 2000년대 들어와서 600건 전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분쟁은 대폭 증가하고 있다. 노동관계에 대한 민사소송건수는 91년에 1,054건에 불과했으나 2001년에는 2,868건이었다. 과거 10년 동안 약 3배 가량 증가한 셈. 또한 지난 2001년 10월 개별분쟁해결촉진법이 시행된 이후 1년 동안 종합노동상담센터에 접수된 상담건수는 54만건을 넘어서고 있다.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여전히 해고나 체불임금 같은 전통적인 분쟁유형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불황이 심화되고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최근에는 ‘근로조건 불이익 변경’을 둘러싼 분쟁이 두드러지고 있다. 원래는 단체교섭 등 집단적 교섭을 통해 해결해야 할 이익분쟁까지도 개별적 권리분쟁으로 다투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고용형태가 다양화되면서 파트타임노동자나 파견노동자를 둘러싼 분쟁이나 인사·처우에서 성과주의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남에 따라 사정이나 평가를 둘러싼 분쟁도 증가하고 있다.

이정 교수는 “개별적 노동분쟁이 늘어난 배경에는 노조 조직률 저하(2003년 19.6%)에 따른 교섭력의 약화를 무시할 수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래의 노동분쟁해결시스템은 주로 집단적 노사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노동관계 분쟁의 상황이 변화하자 노동법 차원에서도 분쟁해결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결과 2001년에 노동행정기관에 의한 개별분쟁의 ‘조정적’ 해결을 목적으로 한 ‘개별노동분쟁해결촉진법’이 제정됐고, 2004년에는 개별적 권리분쟁에 대한 ‘판정적’ 해결을 목적으로 한 ‘노동심판법’이 제정됐다.

노동심판법은 내년 4월부터 시행이 되는데, 이 법에서 정한 노동심판제도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심판의 근거가 되는 법, 즉 ‘노동계약법’이 제정돼야 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내년부터 시행되는 노동심판제가 노사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을지, 또한 노동계약법 역시 노사 양쪽으로부터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지도 아직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동심판제도가 제대로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애매하게 남아있던 근로계약이나 노동관계 부분에 대한 룰을 명확히 정비할 필요가 있다”며 “이러한 점에서 노동심판제도가 노동분쟁 해결시스템으로 정착할 수 있을지 여부는 노동계약법 입법 여하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동계약법에 ‘벌칙’조항 두지 말자”

노동계약법제를 둘러싸고 벌칙조항을 둘지 여부는 논쟁대상이다. 우리나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처럼 진보적 변호사로 조직돼 있는 자유법조단은 노동계약법제 도입에는 찬성하지만 ‘벌칙’조항을 넣을 필요가 없다는 ‘중간보고서’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노동계약법은 ‘민사적 효력’을 정하는 규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형사적 처벌조항을 둘 필요가 없다.


민사적 효력을 지닌 판례법리를 근로기준법에 담은 것은 우리나라 근로기준법 제31조(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제한)가 대표적이다. 정리해고의 4요건, 즉 인원삭감의 필요성, 해고회피노력,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대상자 선정기준, 해고절차의 타당성 등은 일본 판례법리를 그대로 따 온 것인데, 우리 법에서는 이를 조문화하면서 어길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판례법리를 근로기준법에 넣으면서 형사적 처벌조항까지 함께 담은 경우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와 사정이 다르다. 정리해고의 4요건은 여전히 판례법리로만 존재할 뿐이고, 그나마 예전에는 이들 4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하지 않은 경우에는 해고가 무효가 된다는 경향(79.10.29 동양산소사건)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이 4요건을 해고권 남용을 판단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요소에 불과하다고 보는 경향(2002.12.17 노동대학사건)이 있다.


또한 부당해고에 대해서도 최근까지 판례법상의 ‘해고권 남용법리’로 대응해 오다가 2003년 2월에서야 노동기준법에 해고제한 규정(제18조2)을 뒀다. 법에서는 ‘해고가 객관적으로 합리성을 결하고 사회통념상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권리를 남용한 것으로서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처벌규정은 없다.


즉 일본은 노동기준법에서도 일부 판례법리를 차용한 조항에 대해서도 처벌규정은 두지 않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노동계약법은 노사 당사자의 자주적인 결정을 촉진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지는 법이고, 노동계약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그 내용을 분명히 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형사적 처벌조항을 둘 수 없다는 것이 중간보고서 입장이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동등’할 수 있나
단협상 근로조건 결정권, 법에 담겠다? 논란 팽팽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 제3조에서 규정한 바다. 그리고 대법원도 “사용자가 퇴직금 산정일수를 일부 감축하는 내용의 특별조치는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일방적으로 근로계약의 내용을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기법 3조의 취지에 비춰 근로자의 동의가 없는 한 그 효력이 없다(76.9.29 대법 76다1835)”고 판결했다.


그렇다. 근로조건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 논의되고 있는 노동계약법제는 개별 노동자의 ‘동등한 지위’ 보장을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것마저도 법에 근거를 담아 개별화하겠다는 취지다. 지금도 ‘대등한 교섭력’이 확보되지 않은 노동자가 대다수인 현실에서 우려가 이만저만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목희 열린우리당 제5정조위원장이 아시아나항공조종사노조의 파업에 대해 언급하면서 “국민의 요구와 정서를 외면한 이런 상황이 지속, 반복된다면 임금이 높고 근로조건이 좋은 전문직 노동자의 노동3권을 일부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노동계가 한바탕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발언의 취지가 소득 등을 기준으로 노동자를 분리시키겠다는, 노동관계법의 일부를 적용 제외(opt-out)하겠다는 것은 아님이 확인되긴 했지만 경영계에서는 내심 이런 공방이 공론화되길 기대하는 듯하다.


지난달 열린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법·법경제 포럼에서도 같은 주제로 토론이 진행됐다.


발제를 맡은 한국외대 이정 교수(법학)는 “일본에서는 강행법규에 의한 규제나 노동조합에 의한 집단적 결정매커니즘이 후퇴한 반면 상대적으로 사용자의 단독 결정권이 강화되고 있어 근로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노동계약법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또한 “종신고용 관행이 무너지고 취업형태가 다양화, 개별화되는 현실에서 옛 규정으로는 변화하는 계약관행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다른 형태의 노동자를 ‘하나의 법’에 넣으려니까 엇박자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많다”며 “징벌적 규정이 적용될 노동자는 절대 다수가 아니며 10년 뒤면 노동기준법 적용대상이 10~20%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인재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에서도 노조에 포괄되지 않은 89%의 노동자들이 개별적 분쟁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고, 같은 연구원의 안주엽 연구위원 역시 “최근 고용계약 기간이 짧아져 노동자들 간에 근속년수에 따른 분쟁도 있다”며 “결국 장기고용자(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다 끌고 갈 수 없는 시장구조가 된 셈인데, 앞으로 ‘보호’보다는 양자가 만족할 만한 합리적인 선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양대 박수근 교수(법학)는 “만약 노동계약법제를 만들면 근로기준법은 파편화될 것”이라고 우려했고, 건국대 조용만 교수(법학)는 “근로조건 결정의 개별화는 확대될 수밖에 없겠지만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은 집단적 표준(정형) 기준인데, 개별화에 대비한 법제를 따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정 교수는 “원래 집단적 노동조건 결정을 해야 할 노조의 협상력(bargaining power)이 워낙 떨어지니까 이런 법제라도 만들어서 규범을 정하자는 논리”라고 설명했고, 안주엽 연구위원은 “그냥 놔두면 노동계약법상의 보호도 못 받는 노동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계약법으로라도 보호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강행규범화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한림대 김재훈 교수(법학)는 “계약법제를 만들다 하더라도 강행규정을 통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한국노동연구원 문무기 연구위원 역시 “개별 노동자와 사용자간 대등성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에 근로자 보호를 위해서는 강행법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정 교수는 “취업규칙 변경이나 정리해고 등은 판례법리인데 이를 강행법규로 가져오는 건 문제”라며 “만약 강행법규로 하면 편법 등이 나타날 텐데, 차제에 강행법규로 할 것은 노동기준법에 남기되 유기계약 등 자율적이고 대등한 계약의 스테이지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부산대 이승욱 교수(법학)는 “노동계약법제가 성립하려면 개별 근로자가 대등한 교섭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교섭력이 확보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또한 단체협약이 있어도 개별 근로자의 동의권을 형해화해서는 안 된다는 판례도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적용시키는 데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오히려 “일본에서는 노조가 지나치게 어용화 돼 있어 오히려 노조가 개별 근로자의 자기 결정권을 형해화하고 있는 현상도 나타난다”며 “따라서 근로자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자는 진보학자도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남아공 같은 나라에서는 소득을 기준으로 일부 노동법 조항을 적용제외(opt-out)하기도 하지만 이를 일반화하긴 어렵다”며 “아무리 노동자 내 계층화에 대비한다 하더라도 최저기준인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많고 개별 노동자의 교섭력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약법제 도입 논의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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