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법 개정으로 지방의회제도가 대폭 변경되게 되었다. 국회는 지난 6월 임시회의에서 지방의원 유급제, 기초의원 선출에 중선거구에 및 비례대표제 적용, 그리고 그동안 기초의원에 한해서 배제되었던 정당공천제를 허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지방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지방선거법 개정은 정치개혁특위가 내년 지방선거를 대비하여 정비한 정치관계법 개정의 핵심 중에 핵심이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법 개정은 국민적 합의를 충분히 수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당의 기득권 유지와 정략적인 타협의 소산이라는 비난이 높다.

국민적 논의 없이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끼어들어

이 중에서도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이다. 그간 시민단체나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협의회는 정당공천제의 폐지를 절실히 요구해 왔다. 정당 공천제가 중앙정치의 예속과 공천비리, 패 가르기 식 지역선거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법 개정에서는 기초자치단체장 후보의 정당공천이 배제되기는커녕, 기초의원후보의 정당공천까지 추가로 허용되게 되었다.

물론 정당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 정치제도 하에서 기초의원 선거에 정당공천제를 도입하는 것이 원론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광역의원 선거에 정당공천제가 도입되어 있어 기초의원만 배제한다면 형평성에 논란이 있을 수 있고, 또 지방정치에서도 정당이 능력 있는 후보를 추천하여 후보자와 정당이 같이 유권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후진성과 그간의 지방선거제도의 운용경험으로 볼 때 현실은 이런 이상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특히 정당 공천제는 공천비리와 고비용 선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지역주의가 온존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영남은 한나라당, 호남은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 후보를 공천하면 거의 당선이 되었기 때문에 사법처리 된 것은 몇 건이 되지 않더라도 공천을 둘러싼 비리가 성행한다는 것은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공천헌금으로 비용을 쓰고, 정당간 사활을 건 경쟁으로 과열선거가 되면서 선거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더구나 지방의원의 유급제와 정당공천제가 같이 실시됨으로써 해당 지역 국회의원의 사무장이 광역의원, 그 하위 조직원이 기초의원으로 공천될 우려가 있어 사실상 지방의회가 국회의원의 지역조직화 할 공산이 크다. 지금도 소위 내천(內薦)이라 하여 기초의원을 암묵적으로 추천하는 방식이 성행하는데, 중앙당 인사나 국회의원이 내려오면 의원들이 마중 나가기에 바빠 회의가 성원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지역주의 온존 속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시기상조

학자들 중에는 정당정치의 폐해를 정당 공천을 배제함으로써 치유하려 하지 말고, 정당 공천제의 민주적 개혁을 통해 정면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에 각 당에서 후보자를 민주적 경선으로 뽑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정당 정치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은 몰라도 인구 몇 천에서 몇 만의 기초의원 선거단위까지 경선을 치를 만큼 당원구조가 탄탄하게 구비된 정당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 기초의원까지 공천제로 뽑는다면 그것은 줄서기 공천, 돈 상자 공천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역주의가 온존하고 정당 정치가 후진적인 상황에서 기초의원 선거까지 정당공천제를 확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제가 도입되어야 할 것인가? 필자 생각으로는 기초의 경우 정당을 선거에서 배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정치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거라면 기초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는 정당의 정치적 이념보다는 누가 지역에서 일을 열심히 할 사람인가 하는 것이 주된 판단기준이 된다.

기초의원 선거는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 치열하고 선거비용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사회, 정치적 경험이 부족하거나 인지도가 낮더라도 지역에서 환경이나 주거문화, 교육, 육아 운동 등을 꾸준히 해온 지역의 청년이나 혹은 주부들이 진출하기가 용이하다. 때문에 그동안 기초의회 선거에서 이런 청년이나 여성, 주부들의 진출이 적지 않았다.

필자가 사는 지역에서도 오랫동안 아파트 주민운동을 해 온 주부가 인근 주부들의 지지를 받아 구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구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관변단체에 대한 보조금의 지급금지, 학교급식조례 제정 등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정당공천제가 기초의원 선거에까지 적용된다면 이런 비정치적인 주부나 지역의 청년활동가들의 등장이 어렵게 된다. 정당간의 각축전에 평범한 지역운동가나 주민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중앙정치 예속 벗어난 주민자치 의정활동 돼야

일본의 경우 지방선거에 정당공천제를 광범하게 허용하고 있지만, 90년대 중반부터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때문에 특정 지지 정당을 갖지 않은 무당파(無黨?)층이 크게 늘고 있다. 현재는 무당파층이 유권자의 약 반에 이른다고 한다. 무당파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기존 정당인도 공천을 마다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정당간의 정쟁이나 당리당략에 식상하여 무당파층이 늘면서 결국은 이들이 선거 그 차제에서 떠남으로서 갈수록 투표율이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미국도 1930년대에 지방행정부패로 인해 촉발된 지방자치 대개혁운동 뒤 캘리포니아 주 등 상당수가 비 정당 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비 정당 선거제를 도입하고 있는 지역이 약 70%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될 당시에 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적어도 기초의원의 경우 중앙정치의 예속에서 벗어나 주민 생활 중심의 의정활동을 펼치도록 하자는 합의가 있었고,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왔다. 더구나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협의회나 지방분권운동 단체에서는 이번 정치개혁특위의 정치관계법 개정과정에서 기초자치단체장까지 정당공천에서 배제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럼에도 이런 논의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채, 지방의원의 유급제라는 당근을 핑계로 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를 국민적 논의 없이 끼워 넣은 것은, 여야,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중앙 정치인들의 자기 이익 챙기기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정당공천제는 가을 정기국회에서 재개정되어야 하며, 이왕에 논의하는 김에 기초단체장의 정당공천제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주민의 생활자치를 책임지는 기초자치단체장이나 기초의원이 공천의 칼자루를 진 국회의원의 하수인이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