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적 근거 없는 기여도 철폐하라!” “민주열사정신 왜곡하고 폄하하는 민주화운동심의위 각성하라!” 농성장 옆에 놓여 있는 각종 구호의 판넬이 농성의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농성장 중앙에는 ‘류재을·우종원·김용권·장재완·조정식·노수석·권희정’ 등 열사의 영정이 놓여 있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그 아래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다.
유가족들은 오후 ‘보상심의위’와 면담을 앞두고 ‘기여도 폐지’ 관련 입장을 모으기 위해 스티로폴 장판에 둥그랗게 모여 앉았다.
“법률적 근거 없는 기여도, 원천무효”
“징역 몇년을 산 자식은 명예회복이 안 되고, 시위현장에만 있었으면 명예회복이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보상심의위가 교통사고 보험처리 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기여도 측정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김용권 열사의 어머니는 “남의 아들 목숨을 가지고 왜 난도질을 하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열사’ 어머니들의 심정은 모두 같으리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이하 추모연대)에 따르면 2001년 11월27일부터 2005년 2월14일까지 5년여 동안 180여명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하 민주화운동법)’ 관련 신청을 했다. 전체 사망인정자는 90여명 남짓. 이 가운데 24명이 ‘민주화운동 기여도’ 혹은 ‘민주화운동 관련성’ 판정을 받았다.
권희정 열사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권희정 열사는 성신여대생으로 학원자주화 단식투쟁 후유증으로 지난 96년 사망했다. “우리 희정이만 해도 학생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무슨 잣대로 50%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학생운동의 기본이 학원자주화투쟁 아닌가.”
유가족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보상심의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부산대 출신으로 방위병 근무중에 중요문건이 보안대에 넘겨지자 조직보위를 위해 자결한 장재완 열사의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에 대해 더욱 답답해 했다. “당시 유서 3통이 발견돼 명예회복은 되었지만 기여도 60%가 매겨졌어요. 당시 활동을 같이 했던 동료들이 나서주면 좋은데, ‘시기상조니까 아직 나서지 못하겠다’고 하고요. 부모로서 정말 궁금하죠.”
노수석 열사의 아버지가 말을 이어 받았다.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했으면 그만이지. 그 가치를 수치로 재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법적 근거도 없고, 심사기준도 제시하지 못하는 ‘기여도’는 원천무효이고 폐지시켜야 돼요.”
기여도 채점, ‘명문화된 기준’도 없어
민주화운동법 6조에 의하면 ‘관련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는 관련자의 희생의 정도에 따라 보상하되, 그 생활 정도를 고려하여 보상의 정도를 달리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문제는 이 규정을 보상위와 유가족이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 추모연대는 ‘근거 없는 잣대로 더이상 민주열사 정신 왜곡 말라’는 성명에서 “민주화운동법은 사망인가, 상이인가 등 ‘희생의 정도’를 판단하는 것이지 민주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를 정하는 것은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법적근거가 없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보상심의위는 ‘희생의 정도’를 확대·유추 해석하고 있다. 심의위의 조현기 의안계장은 “원칙으로 하면 ‘불인정’ 사안인데 ‘간접적 관련성’ 사안과 관련해 ‘기여도’를 매긴 것”이라며 “성격이 애매하고 불명확한 사안에 대해 위원들간의 난상토론을 통해 결정하고 있으며 명문화된 기준은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간단하다. ‘기여도’를 어떤 근거로 어떻게 책정했는지 공개하면 된다. 그러나 보상심의위는 투명하게 일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명문화 기준’도 없이 위원들 간의 논의만으로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90%까지 차이를 둔다는 것은 ‘자의적 해석’ 논란이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가족들이 정보공개 요청을 해도 열사의 행적만 나열되어 있을 뿐 본위원회 심의 내용은 녹취를 풀어 놓지도, 공개하지도 않고 있다는 것이 유가족들의 설명이다. 또 2001년부터 시행된 ‘기여도’ 방식을 민주화 관련 단체나 유가족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투명성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할 여지는 현재로서는 적어 보인다. 추모연대의 이형숙 명예회복위원장은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위원들의 학식과 경험 등 전문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잦은 위원 교체와 비상임 운영 방식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인 강민조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보상심의위 위원들이 비상근으로 일하다 보니 책임감이 없어요. 직원들도 행자부, 법무부 등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들이다 보니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할 수가 없죠.”
국무총리 소속 국가기구인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의 무책임과 권한 부재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례다. 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한 모든 위원이 비상근으로 일주일에 2시간 정도 회의를 하는 구조다. 또 위원장은 파견공무원들에 대한 인사권도 없다.
심의위 위상 제고, 노동열사 관심 높여야
“보상심의위는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성의 있는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 예전에는 유가족 문제가 전체 운동 차원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유가족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추모연대 이형숙 명예회복위원장은 “학생열사에 견줘 상대적으로 노동열사들은 부모들이 연로하거나 생활이 어려워 명예회복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고, 민주노총과 단위노조도 몇번을 연락해도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죽은 자식을 놓고 보상금 더 타려고 한다는 항간의 오해가 제일 두렵다”는 민주화열사 유가족들. 그들의 간절한 소망은 단 하나. 자식들의 완전한 ‘명예회복’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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