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보장 후평가, 산재심사평가기관 독립, 재활급여 신설을 골자로 한 산재보험법 개정안이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 발의로 제출됐다. 이번 개정안은 선보장 후평가 등 산재노동자의 오랜 숙원을 담은데다 산재보험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노동건강연대, 단병호 의원은 지난 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산재보험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사진> 이날 공청회에서는 노사정 각 주체간 개정안을 둘러싼 의견차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뜨거운 공방이 이어졌다. 


‘선보장 후평가’ 산재노동자의 오랜 숙원

이번 개정안은 크게 산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구제하고 산재 승인 이전에라도 요양급여에 한해 우선 보장해주는 ‘선보장 후평가’를 가장 우선적인 의미로 꼽을 수 있다. 본인이 당한 재해의 업무상 관련 여부를 몰라 산재 요양신청을 하지 못했던 ‘산재 미인식 노동자’를 모든 요양기관의 의사(담당주치의)가 ‘산업재해분류기준표’에 의거해 산재 판단을 하도록 한 것은, 그만큼 노동자와 산재보험의 거리차를 반영한 것이다.

[쟁점] 의사가 산재 판단할 수 있나?

또 개정안에서는 의사가 산재 판단한 경우 노동자나 유족에게 사실을 고지하고 3일 이내 공단에 요양신청을 하도록 했다. 의무를 미이행한 경우 최대 2천만원 이내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이의 전제는 건강보험과 같이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 도입을 제시했다. 또한 선보장 후평가는 그동안 산재·노동단체가 꾸준히 제기해온 과제로, 승인이 지체되거나 나지 않는 경우 노동자가 스스로 요양비를 부담해야 했던 현실을 개선해 통보 이전에라도 요양급여에 한해 우선 보장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공청회에서는 산재 미인식 노동자 구제를 위해 의사가 ‘산재분류기준표’를 보고 산재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의견차가 드러났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임준 가천의대 교수(산업의학)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과정을 폐지하고, 의사가 산재 산재분류기준표라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산재 여부를 판단, 공단에 신고하는 체계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산재 여부를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쉽게 산재 요양신청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의사의 산재 판단과 관련, 의무화에 대한 부담감, 대형병원의 당연지정제 기피, 의사들의 보수성 등의 현실적 한계와 산재분류기준표의 객관성과 공정성 등이 전제가 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모든 의사들에게 업무상 인과관계 판단을 일차적으로 수행토록 하는 것은 현재 의사들의 보수적인 경향에 비춰 실효가 없을 것 같다”며 다소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쟁점] ‘선보장 후평가’ 정착하려면…

또 손경미 공인노무사(법인 한맥)는 “그동안 업무상 재해 여부에 대한 의사 소견서를 받기도 어려웠던 측면에서 (의사들이) 산재분류기준표에 따른 분류의무를 해태할 가능성도 높다”며 “의무위반을 이유로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은 그 외 제반조치와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 방안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의사집단이 개정 산재보험법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한편으로 선보장 후평가가 성공하려면 외국사례도 고려해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경우 노재보험정보센터에서 운영하는 ‘진료비대부사업’과 ‘노재진료공제사업’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제도로서, 진료비대부사업은 산재보험이 진료비를 병원에 지급할 때까지 센터가 무이자로 병원에 진료비를 대부하는 것이며, 노재진료공제사업은 노동자가 비용부담이 없을 경우 진료비나 대부금을 센터가 대신 지급하는 제도이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승인 권한 폐지

산재심사평가기관을 독립하자는 것은 지금의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승인 권한을 폐지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보험기금 운용자인 공단이 보유하고 있는 산재 승인권한을 없애고 1차적으로는 앞서의 담당주치의가, 종국적으로는 독립법인인 심사평가원이 산재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자는 것을 개정안은 담고 있다.

강문대 단병호의원 보좌관은 이날 발제를 통해 “산재보험의 사회보험적 성격을 고려하면 현재처럼 엄격한 인과관계를 요구하고 그 입증을 재해노동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문제”라며 “일차적으로 의사가, 종국적으로 공단과 제3의 기관인 ‘산재보상보험심사평가원’이 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그동안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 등이 제기한 ‘진료비심사게계일원화’의 주장과 맞물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장 의원 등은 지난해 10월 “자동차·산재·건강보험의 심사평가체계를 일원화해 의료서비스 과다이용을 억제하고 의료서비스 적정성을 평가해 궁극적으로 국민의료비 부담을 줄여야 한다”며 현재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의 심사평가의 일원화를 주장한 바 있다.

[쟁점] ‘산재심사평가기관의 독립’ 관심 높아

제3의 독립적 산재심사평가원을 두자는 개정안의 내용에 대해 이날 발표자로 나선 박은철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연구실장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박 실장은 “산재심사평가원 설립 배경에는 동의하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대안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활용을 제시한다”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전문인력을 갖추고 전문성과 공정성을 갖췄으며 산재 요양급여와 관련된 건강보험 요양급여와의 연계도 가능하다”고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체계의 상이성에 기인해 이 의견에 대해서는 발표자들 대부분 반대 의견이 많았다. 

이와 함께 산재승인 권한이 폐지된 근로복지공단은 진정한 노동자를 위한 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임준 교수는 “선보장 후평가로 전환되려면 산재보험 급여제공 및 관리운영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며 “별도의 입증절차나 승인과정 없이 사업주 및 의료기관의 신고에 따라 자동적으로 급여가 제공되도록 해야 하고, 산재예방서비스, 직업·사회복귀까지 재활서비스 등을 포괄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날 부정적 입장을 내놨다. 권영순 노동부 산재보험과장은 “근로복지공단과 역할이 유사한 산재심사평가원을 설립하는 것은 기능과 조직의 중복문제가 제기된다”며 “특히 공단 산재심사실 존폐문제 검토, 건강심사평가원과의 진료비심사체계 일원화 선결도 필요하다”며 에둘러 반대했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측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객석에서 공단 관계자는 질의를 통해 “보험은 종합·과학적 영역으로 공단도 판단이 어려워서 전문가 협의회를 두고 있다”며 “과연 의사가 쉽게 산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며 산재승인 권한 폐지에 불만을 표했다.

[쟁점] 재활급여 도입에는 ‘긍정적’

개정안에는 현행 보험급여에 포함돼 있지 않은 재활급여를 신설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강문대 보좌관은 “재활급여는 노동자가 업무상 재해를 당해 요양 중이거나 요양종료 후 재활이 필요한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며 “요양 중 치료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의료재활’과는 구분되는, 순전히 재활 그 자체의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재활급여의 종류로는 △직업재활 △사회재활 △심리재활로 구분했다.

이같은 의견에 대해 노동계는 모두 환영했다. 그동안 산재·노동단체들은 산재요양 후 원직장 복귀가 이뤄지지 못해 노동자들이 고통 받고 있다며 재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발표자로 나선 임성호 한국노총 산안부장은 “기존의 규정만으로는 산재장해자의 원직복귀가 보장되지 못하고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직장복귀지원금제도도 현실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다”며 재활급여 도입에 찬성했다. 또 객석에서 박세민 금속연맹 산안국장은 의견을 통해 “재활급여에는 산재노동자가 겪는 심리적 위축 등에 대한 ‘심리치료’도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권영순 산재보험과장은 “산재환자의 조속한 직장·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해 재활급여 도입은 필요하다”며 “다만 휴업급여 등의 여타 보험급여 지급체계와의 연계 등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곧이어 터질 ‘산재보험 빅뱅’의 선제구

이밖에도 이날 공청회에서는 보험가입자(사용자)의 심사 및 재심사 청구와 행정소송을 금지한 것에 대한 의견도 뜨거운 편이었다. 강문대 보좌관은 “산재보험의 사회보험적 성격을 볼때 보험가입자의 심사 또는 재심사 청구, 행정소송은 부당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발표자로 참여한 김판중 경총 기업안전팀장은 “개정안에서 사업주 권리를 포기하도록 명문화 한 것은 사업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대의견을 냈다.

이번 개정안은 지난 수년간의 산재·노동단체의 요구에 기초해 단병호 의원이 지난 1년여를 산재·노동단체들과 함께 연구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성과 현실성 모두를 담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동안의 제기된 과제들을 '법안'으로 집대성해 제출했다는 의미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이어진 장복심 의원 등의 진료비심사체계 일원화 제기에다가, 노동부의 산재보험제도개선 연구결과가 오는 11월 중 발표되고, 조만간 경총도 그동안 준비한 산재보험제도 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인 상태에서 단병호 의원의 개정안은 곧 형성될 ‘산재보험 빅뱅’을 앞두고 ‘선제구’를 날렸다는 점에서 앞으로 산재보험 개혁 논의의 향배에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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